2011.12.31 21:07
대망 (11): 이에야스 독립 [펌]
이에야스가 오카자키성에 입성해서 맨 처음 한 일은 허물어진 성벽과 건물들을 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주대리는 셋방살이같은 마음가짐이어서였는지 관리가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더불어서 십수년 동안 궁핍했던 역대 가신들이 다시 성내로 들어와서 봉록을 돌려받고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일본역사에 대해서 조금 짚어보겠습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숙적 헤이께를 격파하고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운 이래 명치유신까지 700년간 봉건시대가 있었습니다.
700년간의 일본 봉건제도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 갔는지를 이해하면 일본역사서나 소설을 읽을 때 매우 도움이 됩니다.
일본사람이면 누구나 알고있다는 츄신구라(忠臣藏)...
츄신구라는 억울하게 참소당해 할복한 주군의 복수를 위해 47인의 충신들이 오래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복수했는데,
비록 원수지만 막부의 중신을 참살한 것은 참형감인 것을 충성심을 인정받아 명예형인 할복형으로 감형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일본 봉건시대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일본사람에 대한 열등감같은게 살짝 생깁니다.
저렇게 충성심이 높으니 일본이 선진국이 된거야.. 일본놈은 밉지만 그 놈들 의리는 부럽다..
일본이 한창 잘 나가던 80년대, 이런 열등감이 들어서 씁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사람에게는 특별히 충성심 유전자나 의리 유전자같은게 따로 있는걸까요?
아니면 일본의 풍토나 환경에 일본인을 의리있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뭔가가 있는걸까요?
저는 유전자나 풍토의 차이가 아니라 일본의 사회시스템이 충성을 특별히 강제해왔기 때문이라는 의견입니다.
저한테는 북조선인민들이 어버이수령을 경애하는게 가식이 아닌 진심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신기했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사회시스템 속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면 보통 사람도 저절로 수령을 경애하게 된다고하더군요.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츄신구라가 일본 역사에 수없이 발생한 것은 일본의 유구한 봉건제도 때문이었습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마쿠라막부를 개창한 후로 일본은 수백명의 다이묘들이 연합한 합중국이었습니다.
각각의 다이묘는 스위스의 칸톤이나 미국의 스테이트와 비슷하게 사법권 군사권에 외교권까지 갖춘 독립국입니다.
막부의 장군이 이 다이묘들에 대한 지휘권을 천황에게서 이양받아 일본을 지휘하는 겁니다.
다이묘간의 분쟁이 벌어지거나 외국의 침략이 발생하거나하면 장군이 처분이나 명령을 내리는 시스템.
만약 어떤 다이묘가 장군의 처분을 받아 가이에키(改易 영지를 몰수당하는 것)를 당하면 무슨일이 벌어질까요?
영주인 다이묘는 대개 할복처분을 받게됩니다. 영주는 거의 여왕벌같은 존재여서 영지를 몰수당하면 살 길이 없습니다.
다이묘가 할복 혹은 운좋게 머리를 깍고 절간으로 들어가면 그 영지에는 다른 영주가 명을 받아 들어오게 됩니다.
새로운 영주는 조선의 사또처럼 달랑 혼자 부임해 오는 것이 아니라, 가신 일체를 거느리고 들어옵니다.
영지에서 녹봉을 받던 기존의 천석짜리 백석짜리 오십석 삼십석짜리 무사들이 모두 봉록을 잃게됩니다.
봉록만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내의 거택까지 빼줘야 합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기업의 오너가 바뀌는데 생산직만 빼고 관리직은 모두 짤리는겁니다.
직장만 짤리는게 아니고 사택도 빼줘야하는 합니다. 한 순간에 알거지가 되는 셈입니다.
요즘에는 퇴직금으로 식당이라도 열어서 호구지책을 열지만, 한번 무사는 죽어도 무사입니다.
수중에 남은 몇푼이 떨어지면 그때부터 굶어야합니다. 아내는 날품을 팔고 아이들은 반거지가 됩니다. 하루 한끼 먹습니다.
요즘의 명퇴 은퇴하고는 비교할수 없는 문자 그대로 인생막장이 가이에키입니다.
가이에키를 당하지않으려면 최대한 충성을 바쳐야합니다. 내 한 목숨 바치는건 가이에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목숨 바쳐 충성을 다 하면 나는 죽더라도 처자식은 이어집니다.
전쟁에서 지면 무조건 가이에키입니다. 사무라이가 용감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는 시스템입니다.
십사년 전, 미카와의 가신들이 느닷없이 어이없는 가이에키를 당했습니다.
주군 히로타다가 비명에 죽고 유일한 혈육인 이에야스가 오다에게 인질이었을 때 요시모토가 성주대리를 보냈습니다.
성주대리 사케다는 자신의 가신들을 모조리 이끌고 미카와 오카자키성으로 들어왔습니다.
미카와의 가신들은 모든 봉록을 내어놓고 성내의 거택도 물러나서 들로 산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이에야스가 슨푸에 인질인 동안 미카와의 이름있던 가신들까지 신생아 옷조차 마련해줄 여유가 없었답니다.
딸이 태어난지 6년 동안 발가벗겨 키우다가 7살때 비로소 겉옷을 지어주었다는 가신들의 궁핍은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난뿐이 아닙니다. 성주대리 사케다의 가신들 중에 상급무사는 차치하더라도 잡병들조차 마치 점령군처럼 거만합니다.
후에 십만석 오만석의 영주가 되는 미카와의 이름있는 무사들이 모두 사케다의 잡병들에게 거지취급을 당합니다.
아직 이에야스가 살아있다는 것이 가신들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에야스가 성년이 되어서 다시 복귀하면 지금의 처절한 궁핍과 치욕이 모두 옛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절의 미카와무사들은 사케다의 가신들에게 수수께끼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미카와 영내에서는 새색시처럼 고분고분한 미카와무사들이 전쟁터에만 나서면 호랑이처럼 사나워지기 때문입니다.
미카와 무사들이 사케다의 잡병들에게조차 고분고분했던 것은 이에야스의 안위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미카와 무사들과 사케다의 가신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면 경우에 따라서는 이에야스가 할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에야스가 할복하거나 암살당하면 촛불은 꺼집니다.
신분이란게 추락하는것은 순식간이지만, 올라가기는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이에야스가 죽으면 미카와무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하늘에 별따기를 시작하거나 앞으로도 쭈욱 거지로 살아야합니다.
이에야스 주종이 감격에 겨워 오카자키성의 문지방에 눈물을 쏟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퇴락한 성내의 건물과 헐거워진 성문 군데군데 무너져가는 성벽의 수리와 함께 영지도 순식간에 안정되었습니다.
이에야스가 뜻밖의 행운에 아직도 감격하는 동안 주장 요시모토가 전사한 이마가와 슨푸성은 초상집입니다.
성내의 모든 부인들은 남편의 생사에 목을 메고 소식을 들으려 성내의 이곳 저곳을 기웃거립니다.
요시모토의 아들인 우지사네는 전형적인 오렌지족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풍족함 속에서 원하는 것은 기어코 손에 넣고야말았던 향락소년 우지사네..
화려한 교토풍으로 용모를 가꾸고 성내의 처녀들을 집적거리다 싫증나면 금새 잊어버리는 화도남입니다.
귀찮은건 질색이고 아무것도 고민해본적이 없는 화려한 재벌2세 이마가와 우지사네에게 귀찮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설에서는 우지사네가 전사한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적혀있습니다만, 실제로 그랬을까는 의문입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복수전을 시도조차 않고 그저 수비만 하다가 그 수비마저 실패한 한심한 아들에 대한 비난일 수 있습니다.
우지사네는 반독립한 이에야스에게 사자를 보내 힐문합니다.
왜 허락도 없이 오카자키성을 점령했느냐는 힐문과 다시 성을 양도하라는 명령에 이에야스가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성주대리 사케다가 연락도 없이 성을 버렸고 오다군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정도로 사태가 급박했다.
아직도 오다는 국경에 집결해있고 오카자키성은 한시도 비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성의 양도는 현재로선 불가하니 양해바람..
우지사네, 정확하게는 우지사네의 측근들은 이에야스를 강제로 퇴거시킬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독립한 이에야스를 결정적으로 오다측으로 전향시키지않는 방법은 느슨한 동맹을 용인하고
슨푸에 억류되어 있는 이에야스의 처자식과 미카와중신들로부터 받은 인질들을 소중히 잡아두는 것이 현책입니다.
1년 동안 오다는 이에야스를 기다려줍니다.
성급하기로 유명한 노부나가가 1년동안이나 참아주었다는 것은 노부나가의 가신들도 깜짝 놀란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노부나가의 사자도 여러번 오카자키를 찾았습니다.
이에야스의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처자식이 인질로 잡혀있으니 노부나가공도 이해하시리라.. 전해주시오..
노부나가는 이해합니다. 보면 볼수록 이에야스는 적으로 돌리기에는 아깝고 무서운 대장입니다.
영지를 안정시키고 가신들을 휘어잡는 이에야스의 기량을 첩자들의 보고를 통해 속속들이 듣고 있는 노부나가입니다.
은근하지만 끈질기게 오다의 사신이 방문합니다.
와서 특별히 압박하는 것은 없지만, 방문 자체가 무거운 압력입니다.
사신의 요구는 단 하나, 이에야스의 오와리 방문입니다.
더 이상 노부나가를 기다리게 하면 위험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모든 일은 시기가 중요한 법, 결단을 내린 이에야스가 다시 찾아온 사신에게 말합니다.
노부나가공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하는 것은 무사의 도리를 모르는 무참한 일..
그 옛날 오와리에서 노부나가공과 같이 어울리던 시절이 그리우니 날을 잡아 공을 만나고 싶소...
이에야스와 노부나가의 만남은 매우 극적이었다고 합니다.
눈부신 승자 노부나가와 달리, 패자였던 이에야스는 초라한 입장입니다.
노부나가에게 진 요시모토의 수하였던 이에야스, 노부나가와 격이 다릅니다.
노부나가의 거성인 기요스를 방문한 이에야스 일행은 살짝 거만했다고 합니다.
승자를 방문하는 미카와 무사들의 열등감이 사나운 인상으로 표출된 셈입니다.
오와리 백성들은 두 번 놀랍니다.
약해빠진 미카와 영주 따위가 노부나가 성하에서 거만하게 구는 것과
영접나온 노부나가의 부장들이 지나치게 공손해서 마치 승자와 패자가 바뀐것같아서 두 번 놀랐다고 합니다.
사나운 노부나가가 삼일 밤낮으로 상냥하게 이에야스를 접대하는 것에 노부나가의 부하들도 깜짝 놀랍니다.
72시간 동안의 이에야스 방문, 사무적인 이야기는 양국의 국경을 야하기강으로 정한 단 한 마디뿐이었다고 합니다.
노부나가의 그릇은 천하를 담을만하고 이에야스의 보자기는 그 노부나가조차 부드럽게 감싸안습니다.
드디어 노부나가와 동맹하고 이마가와와 결별한 이에야스, 슨푸의 처자식은 어떻게 될것인지가 난제입니다.
난세의 법으로 모반은 그냥 참형도 아닌 톱질형이나 십자가형입니다.
[펌 끝]
성주대리는 셋방살이같은 마음가짐이어서였는지 관리가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더불어서 십수년 동안 궁핍했던 역대 가신들이 다시 성내로 들어와서 봉록을 돌려받고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일본역사에 대해서 조금 짚어보겠습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숙적 헤이께를 격파하고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운 이래 명치유신까지 700년간 봉건시대가 있었습니다.
700년간의 일본 봉건제도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 갔는지를 이해하면 일본역사서나 소설을 읽을 때 매우 도움이 됩니다.
일본사람이면 누구나 알고있다는 츄신구라(忠臣藏)...
츄신구라는 억울하게 참소당해 할복한 주군의 복수를 위해 47인의 충신들이 오래동안 기회를 엿보다가 마침내 복수했는데,
비록 원수지만 막부의 중신을 참살한 것은 참형감인 것을 충성심을 인정받아 명예형인 할복형으로 감형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일본 봉건시대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일본사람에 대한 열등감같은게 살짝 생깁니다.
저렇게 충성심이 높으니 일본이 선진국이 된거야.. 일본놈은 밉지만 그 놈들 의리는 부럽다..
일본이 한창 잘 나가던 80년대, 이런 열등감이 들어서 씁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사람에게는 특별히 충성심 유전자나 의리 유전자같은게 따로 있는걸까요?
아니면 일본의 풍토나 환경에 일본인을 의리있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뭔가가 있는걸까요?
저는 유전자나 풍토의 차이가 아니라 일본의 사회시스템이 충성을 특별히 강제해왔기 때문이라는 의견입니다.
저한테는 북조선인민들이 어버이수령을 경애하는게 가식이 아닌 진심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신기했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사회시스템 속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면 보통 사람도 저절로 수령을 경애하게 된다고하더군요.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츄신구라가 일본 역사에 수없이 발생한 것은 일본의 유구한 봉건제도 때문이었습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마쿠라막부를 개창한 후로 일본은 수백명의 다이묘들이 연합한 합중국이었습니다.
각각의 다이묘는 스위스의 칸톤이나 미국의 스테이트와 비슷하게 사법권 군사권에 외교권까지 갖춘 독립국입니다.
막부의 장군이 이 다이묘들에 대한 지휘권을 천황에게서 이양받아 일본을 지휘하는 겁니다.
다이묘간의 분쟁이 벌어지거나 외국의 침략이 발생하거나하면 장군이 처분이나 명령을 내리는 시스템.
만약 어떤 다이묘가 장군의 처분을 받아 가이에키(改易 영지를 몰수당하는 것)를 당하면 무슨일이 벌어질까요?
영주인 다이묘는 대개 할복처분을 받게됩니다. 영주는 거의 여왕벌같은 존재여서 영지를 몰수당하면 살 길이 없습니다.
다이묘가 할복 혹은 운좋게 머리를 깍고 절간으로 들어가면 그 영지에는 다른 영주가 명을 받아 들어오게 됩니다.
새로운 영주는 조선의 사또처럼 달랑 혼자 부임해 오는 것이 아니라, 가신 일체를 거느리고 들어옵니다.
영지에서 녹봉을 받던 기존의 천석짜리 백석짜리 오십석 삼십석짜리 무사들이 모두 봉록을 잃게됩니다.
봉록만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내의 거택까지 빼줘야 합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기업의 오너가 바뀌는데 생산직만 빼고 관리직은 모두 짤리는겁니다.
직장만 짤리는게 아니고 사택도 빼줘야하는 합니다. 한 순간에 알거지가 되는 셈입니다.
요즘에는 퇴직금으로 식당이라도 열어서 호구지책을 열지만, 한번 무사는 죽어도 무사입니다.
수중에 남은 몇푼이 떨어지면 그때부터 굶어야합니다. 아내는 날품을 팔고 아이들은 반거지가 됩니다. 하루 한끼 먹습니다.
요즘의 명퇴 은퇴하고는 비교할수 없는 문자 그대로 인생막장이 가이에키입니다.
가이에키를 당하지않으려면 최대한 충성을 바쳐야합니다. 내 한 목숨 바치는건 가이에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목숨 바쳐 충성을 다 하면 나는 죽더라도 처자식은 이어집니다.
전쟁에서 지면 무조건 가이에키입니다. 사무라이가 용감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는 시스템입니다.
십사년 전, 미카와의 가신들이 느닷없이 어이없는 가이에키를 당했습니다.
주군 히로타다가 비명에 죽고 유일한 혈육인 이에야스가 오다에게 인질이었을 때 요시모토가 성주대리를 보냈습니다.
성주대리 사케다는 자신의 가신들을 모조리 이끌고 미카와 오카자키성으로 들어왔습니다.
미카와의 가신들은 모든 봉록을 내어놓고 성내의 거택도 물러나서 들로 산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이에야스가 슨푸에 인질인 동안 미카와의 이름있던 가신들까지 신생아 옷조차 마련해줄 여유가 없었답니다.
딸이 태어난지 6년 동안 발가벗겨 키우다가 7살때 비로소 겉옷을 지어주었다는 가신들의 궁핍은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가난뿐이 아닙니다. 성주대리 사케다의 가신들 중에 상급무사는 차치하더라도 잡병들조차 마치 점령군처럼 거만합니다.
후에 십만석 오만석의 영주가 되는 미카와의 이름있는 무사들이 모두 사케다의 잡병들에게 거지취급을 당합니다.
아직 이에야스가 살아있다는 것이 가신들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에야스가 성년이 되어서 다시 복귀하면 지금의 처절한 궁핍과 치욕이 모두 옛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시절의 미카와무사들은 사케다의 가신들에게 수수께끼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미카와 영내에서는 새색시처럼 고분고분한 미카와무사들이 전쟁터에만 나서면 호랑이처럼 사나워지기 때문입니다.
미카와 무사들이 사케다의 잡병들에게조차 고분고분했던 것은 이에야스의 안위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미카와 무사들과 사케다의 가신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면 경우에 따라서는 이에야스가 할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에야스가 할복하거나 암살당하면 촛불은 꺼집니다.
신분이란게 추락하는것은 순식간이지만, 올라가기는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이에야스가 죽으면 미카와무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하늘에 별따기를 시작하거나 앞으로도 쭈욱 거지로 살아야합니다.
이에야스 주종이 감격에 겨워 오카자키성의 문지방에 눈물을 쏟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퇴락한 성내의 건물과 헐거워진 성문 군데군데 무너져가는 성벽의 수리와 함께 영지도 순식간에 안정되었습니다.
이에야스가 뜻밖의 행운에 아직도 감격하는 동안 주장 요시모토가 전사한 이마가와 슨푸성은 초상집입니다.
성내의 모든 부인들은 남편의 생사에 목을 메고 소식을 들으려 성내의 이곳 저곳을 기웃거립니다.
요시모토의 아들인 우지사네는 전형적인 오렌지족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풍족함 속에서 원하는 것은 기어코 손에 넣고야말았던 향락소년 우지사네..
화려한 교토풍으로 용모를 가꾸고 성내의 처녀들을 집적거리다 싫증나면 금새 잊어버리는 화도남입니다.
귀찮은건 질색이고 아무것도 고민해본적이 없는 화려한 재벌2세 이마가와 우지사네에게 귀찮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설에서는 우지사네가 전사한 아버지를 원망했다고 적혀있습니다만, 실제로 그랬을까는 의문입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복수전을 시도조차 않고 그저 수비만 하다가 그 수비마저 실패한 한심한 아들에 대한 비난일 수 있습니다.
우지사네는 반독립한 이에야스에게 사자를 보내 힐문합니다.
왜 허락도 없이 오카자키성을 점령했느냐는 힐문과 다시 성을 양도하라는 명령에 이에야스가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성주대리 사케다가 연락도 없이 성을 버렸고 오다군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정도로 사태가 급박했다.
아직도 오다는 국경에 집결해있고 오카자키성은 한시도 비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성의 양도는 현재로선 불가하니 양해바람..
우지사네, 정확하게는 우지사네의 측근들은 이에야스를 강제로 퇴거시킬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제 독립한 이에야스를 결정적으로 오다측으로 전향시키지않는 방법은 느슨한 동맹을 용인하고
슨푸에 억류되어 있는 이에야스의 처자식과 미카와중신들로부터 받은 인질들을 소중히 잡아두는 것이 현책입니다.
1년 동안 오다는 이에야스를 기다려줍니다.
성급하기로 유명한 노부나가가 1년동안이나 참아주었다는 것은 노부나가의 가신들도 깜짝 놀란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노부나가의 사자도 여러번 오카자키를 찾았습니다.
이에야스의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처자식이 인질로 잡혀있으니 노부나가공도 이해하시리라.. 전해주시오..
노부나가는 이해합니다. 보면 볼수록 이에야스는 적으로 돌리기에는 아깝고 무서운 대장입니다.
영지를 안정시키고 가신들을 휘어잡는 이에야스의 기량을 첩자들의 보고를 통해 속속들이 듣고 있는 노부나가입니다.
은근하지만 끈질기게 오다의 사신이 방문합니다.
와서 특별히 압박하는 것은 없지만, 방문 자체가 무거운 압력입니다.
사신의 요구는 단 하나, 이에야스의 오와리 방문입니다.
더 이상 노부나가를 기다리게 하면 위험하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모든 일은 시기가 중요한 법, 결단을 내린 이에야스가 다시 찾아온 사신에게 말합니다.
노부나가공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하는 것은 무사의 도리를 모르는 무참한 일..
그 옛날 오와리에서 노부나가공과 같이 어울리던 시절이 그리우니 날을 잡아 공을 만나고 싶소...
이에야스와 노부나가의 만남은 매우 극적이었다고 합니다.
눈부신 승자 노부나가와 달리, 패자였던 이에야스는 초라한 입장입니다.
노부나가에게 진 요시모토의 수하였던 이에야스, 노부나가와 격이 다릅니다.
노부나가의 거성인 기요스를 방문한 이에야스 일행은 살짝 거만했다고 합니다.
승자를 방문하는 미카와 무사들의 열등감이 사나운 인상으로 표출된 셈입니다.
오와리 백성들은 두 번 놀랍니다.
약해빠진 미카와 영주 따위가 노부나가 성하에서 거만하게 구는 것과
영접나온 노부나가의 부장들이 지나치게 공손해서 마치 승자와 패자가 바뀐것같아서 두 번 놀랐다고 합니다.
사나운 노부나가가 삼일 밤낮으로 상냥하게 이에야스를 접대하는 것에 노부나가의 부하들도 깜짝 놀랍니다.
72시간 동안의 이에야스 방문, 사무적인 이야기는 양국의 국경을 야하기강으로 정한 단 한 마디뿐이었다고 합니다.
노부나가의 그릇은 천하를 담을만하고 이에야스의 보자기는 그 노부나가조차 부드럽게 감싸안습니다.
드디어 노부나가와 동맹하고 이마가와와 결별한 이에야스, 슨푸의 처자식은 어떻게 될것인지가 난제입니다.
난세의 법으로 모반은 그냥 참형도 아닌 톱질형이나 십자가형입니다.
[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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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회시스템이 충성을 특별히 강제해왔기 때문이...'사실 저도, 그리고 우리세대도 약간의 일본에 대한 열등감이 좀 있었지만, 대망을 읽으면서 느낀겁니다.자연스런 인간성과 너무 반하는, 인위적이고 극적인 죽음을 미화/예찬하는 문화...할복이라던지시동이 주군의 머리를 쳐주는 행위 (패색이 짙어갈때)가미가제버어마 전선에서 몇개월간 단 한명의 항복하는자가 없음죽창을 입에물고 벼랑으로 떨어져 자결 등등각 개인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설정된 가치를 위해 버려지는, 그리고 그런것을 미화하는 문화/역사는,궁극적으로 도태하리라 보는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