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물론 나이가 들어가는 지금까지도 어머니 날에는 늘 허전함과 공허함을 느끼는 하루를 보내게 된다. 나에게는 세 분의 어머니와 지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태어난 지 두 살이 되었을 때, 6.25전쟁이 시작되었고 그로 인해 낳아주신 어머니와 갓난아기는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신은 인간을 돌보기에 너무 바빠서 어머니란 존재를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란 하나님이 내려주신 크나큰 선물입니다. 산에는 여러 꽃이 흐드러지게 핀 계절에! 무모한 인간들의 전쟁으로 인해 엄마와 머나먼 여정을 달리해야만 했던 갓난아기는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조부모님과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낳아주신 어머니의 첫 모습은 열 살쯤 되었을 때 친척 집에서 빛바랜 작은 사진 속에서 만나뵈었지요. 그때의 느낌은 나에게도 어머니가 계셨다는 행복한 순간과 안타깝고도 서운함도 들었습니다. 엄마의 품속에서 2년 남짓 함께했었던 기억하지 못하는 추억을 남겨 놓으시고 떠나가신 어머니! 당신과 제가 앉고 살아가야만 하는 업(Karma)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 후 형과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따듯한 정을 느끼면서 자랐습니다. 외아들인 아버지는 재혼하셔 다른 집에 사셨지만, 조부모님은 엄마 잃은 손주들을 새어머니 밑에서 기르게 하기에는 마음 편치 않으셨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생활하시기에 풍족한 살림은 손주들을 생각하시는 정을 더욱 굳게 하시었겠지요. 할머니! 하면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초등학교 삼 학년 때의 일입니다. 형이 갑자기 한쪽 눈에 무언가 들어간 느낌으로 아프다고 울면서 보채자, 혀에 참기름을 발라서 빼내어 주려고 하시던 모습! 그리고 저희가 자라서 일 년 간격으로 군대에 가게 되었을 때는 제가 떠난 후 혼자 남으셨지요. 며칠 후 군대에서 보내온 입고 떠났던 손주의 옷을 우체부로부터 받고 얼마나 슬프셨겠습니까. 그 후 가끔 돋보기 너머로 한자 한자 적어 보내주신 사랑의 편지를 부대 안에서 읽었을 때는... 할머니의 그리움으로 눈물짓게 하였습니다. 할머니께서 길러주신 헌신적인 사랑은 저의 가슴에 진하게 남아 있습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세 번째 만난 나의 어머니는 새어머니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부간의 정 없이 사셨던 어머니였고, 같이 생활하신 기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가끔 어린 저에게 답답한 심정을 말씀하셨던 어머니! 당시의 가부장적인 조부모님과의 생활이 쉽지 않으셨겠지요. 할머니 손을 잡고 다니던 학교를 형과 둘이서 다니게 되던 사 학년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 다리 위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주었습니다. 그 후 어머니에게 갖다 드렸는데 내가 미국에 올 때까지도 어머니의 손가락에는 늘 그 반지가 있었습니다. 본인이 낳으신 자식이 있는데도 제가 드린 보잘것없는 반지를 끼고 오랫동안 생활하신 어머니! 시집오신후 조부모님과의 생각이 다름을 생각하며 지내던 생활! 많이 어려우셨겠지요. 세 분의 어머니는 뒤늦게 세월이 흐를수록 고마운 마음이 새록새록 사무칩니다. 생존해 계실 때 잘 해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속 깊은 곳에 안타까움으로 남아있는 것은... 이제야 나이가 들어 철이 들었나 봅니다.
신록의 계절, 계절의 여왕이라고도 일컫는 오월입니다. 이달엔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날 등 가족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다. 지난달 발생한 세월호 침몰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에게 어떠한 말씀으로도 위로가 되지는 않겠지만, 하루빨리 슬픔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가 아주 작은어머니의 마음만이라도 갖고 대하였다면, 그렇게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자세로 많은 학생을 저 세상으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 일로 인하여 더욱더 타인을 배려하는 성숙한 삶으로 각자가 살아간다면 우리는 존경 받는 국민으로 세계란 공동체에서 밝은 세상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다시 한번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