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추억 그리고 이야기

by musim posted Nov 23, 2015 Views 274 Replies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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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국 방문의 단상

이번에도 많은 사람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뒤늦은 가을에 고국을 찾았다. 조금은 쌀쌀한 날씨에도 대한민국 하면 언제나 푸근함이 느껴지는 감정은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긴 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 가는 불편함은 즐거운 마음에 들떠 그리 무료하지 않았다. 한국에는 형제가 있지마는 이번에는 알리지 않고 집사람과 아들 녀석이 같이 떠나는 준비를 해야 했다. 이곳에서 숙소예약을 하고 떠나는 여정이 특별한 의미를 더한다. 집사람과 나는 부모집도 아닌 형제 집에 오래 머무는 것은 서로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기에 어렵사리 생각을 정리하였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들 녀석은 중학교 때 가 본 후 이십 년 만의 방문이라 많은 설렘을 앉고 가는 모습이다. 내 마음 한편으로는 이민 생활에 한 장을 마무리하는 느낌으로 생각되고 그동안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도착한 방에는 큰 침대와 벙커 침대가 놓여있는 서울 동교동의 홍대 근처이었다. 아들 녀석의 눈치는 호텔 같은 수준을 생각하였는지 흡족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세상에 싸고 좋은 것을 바라는 욕심을 버린 나는 그 정도면 괜찮았다. 이렇게 세 식구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생각해 보니 아들 녀석과 함께 잠을 자는 것이 삼십이 년 만에 일이니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다시 있을 수가 있을까! 그동안 길고도 무료한 시간을 가게라는 좁은 공간에서 삶에 바빠 아이들과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이민 생활이 아니었던가를 생각하며 피곤한 여행에 첫 밤을 보낸다.
 
다음날 거리에 나가니 다행히 음식점들이 차고 넘친다. 특히 대학가 근처라서 그런지 거리의 모습도 활기차고 늦어가는 가을에 젊은 친구들과의 부대낌은 오랜만에 한국에서의 생활이 기대를 높인다. 오늘은 방문할 곳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하고 집으로 돌아와 편히 쉬었다. 삼 주 남짓한 시간을 번갯불에 콩 복 듯이 여러 곳을 구경하고 떠나자니 나만의 시간이 없었다. 친구 만날 시간이 없어 전화 속의 음성만으로는 반가움을 메꿀 수가 없었다. 우선 집사람과 아들을 보내놓고 이 주 정도 더 머물기로 하고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한국을 떠난 지 사십 년 가까이 되어 지리를 잘 모르는 아빠가 아들에게 한국민속촌, 서울의 고궁들과 남산, 부산의 태종대, 인천의 자장면 거리, 수원의 화성, 인사동 거리와 한옥마을, 등 나름대로 노력을 했는데 아들에게는 얼마나 뜻깊은 관광이 되었는지...
 
자 이제는 나만의 시간이다. 숙소도 동대문 쪽으로 옮기니 전철로 이동하기 편했다. 학교 때 같은 동네 살던 친구는 안국동 조계사에 가면 되고 다른 친구도 큰 불편 없이 만나게 되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위치는 그래서 첫 번째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오늘은 이른 아침에 남대문시장을 갔었다. 볼일을 마치고 먹자골목에서 아침 식사를 하려다가 이왕이면 관광안내원에게 전문으로 하는 설렁탕 집을 물으니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 이길로 쭉 가셔서 두 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시어 우X식당에 가시면 됩니다 ”  고맙습니다 는 말을 하고는 찾아갔다. 식당 안에는 일본인 네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고 나는 따듯하게 우려낸 국물을 기대하며 설렁탕을 시켰다. 근데 저쪽에서 식사하는 일본인들의 말소리를 전혀 이해는 하지 못하지만 유쾌하지는 아닌듯싶다. 조금 후에 나온 설렁탕을 먹어보니 이게 무언가! 그리 따듯하지도 않고 기름은 둥둥 뜬 처음 맛보는 이런 맛은 왜 일본인들이 궁시렁궁시렁 하였는지 이해가 갈 듯싶다.
 
조금 후에 그들은 일어서서 계산준비를 하려는데 직원 한 분이 다가와 많이 남긴 것을 보고 싸 주겠다며 수선스럽게, 한국말로 하는데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 그들은 칠만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하고 나갔다. 나 역시 이건 아니다 싶어 몇 숫가락 뜨지도 않고 지불하고 나와버렸다. 생각 같아서는 그 길로 되돌아가서 빨간 옷을 입은 관광안내원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의 입맛에 좋았었다면 그뿐 아니겠나 싶어 그만두었다. 한국 정부에서 관광 홍보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국인과 접촉하는 관광 안내원의 소양 교육에 더욱 힘써야 한다. 그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길잡이가 아닌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만에 하나라도 우x식당과의 관계에서의 안내라면 소 잃고 외양간도 잃는 한심한 관광 대책이 될 것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가끔 택시를 타는 기회가 있었다. 기사님들과의 짧은 만남이었지마는 탈 적에는 항상 '반갑습니다' 라며 인사를 하며 차에 올랐다. 모든 분이 친절하였고 그분들의 연세도 주로 오십 대 후반 부터 육십 대 후반으로 보인다. 적지 않은 나이에 쉽지 않은 직업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하루는 시내버스를 타게 되었다. 차에 오르면서 천 원짜리 한 장을 넣고 확실한 금액을 모르니 얼마냐고 물었다. 두 번째 물었을 때야 기사님은 '천삼백오십 원' 하고 소리를 높였다. '입니다' 아니면 '이예요' 라는 말을 붙이면 듣는 사람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텐데...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라도 자기보다 이십여 년 가까이 먼저 태어난 사람에게 무례가 아닐까 한다. 남에게 대접 받는 것을 좋아 한다면 평상시에 타인을 존중 할줄 아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그리 하기가 쉽지 않다.
 
 
바쁘고도 긴, 아니 짧았던 먼 나라의 여행도 끝나고 짐을 꾸려 돌아와야 하는 날이 되어간다. 오늘은 친구들의 점심으로 부터 이어져 간 만남이 아쉬움만 더해간다. 대한극장 앞 충무로에서 시작 된 것이 오늘도 사 차까지 이어지는 행군이었다. 한국의 관습, 아니면 벗을 보내는 정서라 해도 쫒아 다니기에는 즐거우면서도 숙달이 안된 나에게는 버거움을 느낀다. 집에 돌아와 늦은 밤에 짐을 꾸리려니 몽롱한 상태에서 힘이 든다. 모든 것을 집사람의 손재주로 보아만 왔던 내가 뒤죽 박죽 매끄럽게 되지 않으니 내일 아침에 마무리 하기로하고 잠이 들었다.
 
드디어 새 고향으로 출발하는 시간이다. 각본에 짜인 대로 돌아오는 길은 다행히 두 시간 남짓 빠르니 한결 부드럽다. 벌써 나는 길게 늘어진 세관통과를 위해 줄을 선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그분은 내 여권을 보며 기분 좋은 말씀을 건넨다. "WELCOME HOME!"
오면은 가야 하고, 가면 돌아와야 하는 인생길을 건강히 돌보아 주신 분께 감사드리면서 그동안 반갑게 맞아주고, 오랜 시간을 같이 했던 많은 친구에게 고맙습니다.

P.S. 
혹시 어디서 읽으신 분도 있겠지만, 작년 이맘때쯤 고국에서의 추억이 그리워 올려봅니다.
나도 어떤 분처럼 가을을 타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