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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훈련병 (웃기)

by musim posted Dec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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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남자라면 국방의 의무는 당연히 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지금과 같이 권력과 돈을 앞세워 면제받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던 시절로 기억된다. 1960년대 말쯤 이 년 전에 형이 먼저 입대를 하고 이제 나마저도 입영 통지를 받게 되니 혼자 남으신 할머니를 뒤로하며 떠나기가 가슴이 아려온다. 입영 전날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를 빡빡 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군대란 조직에서 당연히 있어야 하는 규범이지만, 그때는 갑자기 바뀌는 생활환경에 불안과 초조한 날을 보내다 머리를 밀고 나서는 미련 없이 준비된 병사가 되었다. 입대할 당시에 사귀던 아가씨가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애처로운 장면을 뒤로하고 기차에 올랐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저 고무신 거꾸로 신고 도망간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누가 일편단심으로 삼 년 반의 세월을 기다려 줄 것인가!! 자주 만나 “쎄시봉”을 들락날락하며 유행을 따라가는 싱싱한 젊은 시절이 있었으니, 그녀가 현실보다 추억이 더 아름다움으로 가슴에 저며 올 때까지는 희망이 있겠지만…

입대 다음날, 같이 입소한 동료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주사 한 방씩을 맞았다. 모두 나중에 알았지만, 사귀던 아가씨 생각이 나지 않게 대한민국 정부에서 하사한 주사이란다. 어쩐지 맞고 난 느낌이 꼭 "아지노모도"에 "7-up"을 타서 마신 기분이었다.ㅎㅎ 그렇게 약 8주(?)간의 훈련은 시작되었고 고달픈 하루하루의 반복이었다. 입대할 때 입고 온 옷들은 전부 벗어 집으로 부쳐 주고, 같은 훈련복을 입으니 뒷모습만 보면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안된다. 나는 조심해서 집을 떠나기 전에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끈이 달린 아주 작은 주머니를 감추어 두었다. 거기에는 돈 몇 푼이 들어있는 나의 전 재산이 들어있었다.

작은 손주를 걱정하신 할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다. 지금의 집은 보통교실보다 적은 크기에 가운데는 통로가 있는 막사이다. 마주 보는 침상에서 30여 명이 같이 생활하는 비좁은 공간에 감추어 둘 곳은 없었다. 나는 작은 주머니를 밑천 위에 두고 양쪽 끈을 허리에 묶고 생활하였다. 그때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곳이 제일 안전한 금고로 생각이 들었다. 며칠이 지난 후, 그날도 심한 훈련으로 누구나 할 것 없이 눕자마자 코를 고는 소리가 자장가 소리로 들렸다. 나는 그날도 잠들기 전에 팬티 속에 주머니를 확인하고 깊은 잠이 들었다. 어느새 새벽이 되어 기상나팔 소리에 어쩔 수 없는 하루가 시작된다. 졸린 눈을 비비며 오늘도 팬티 속에 귀중한 주머니를 만져 보니 잡히지를 않는다. 아뿔싸! 간밤에 어느놈이 떼어 간 것이다. 아무리 눈 감으면 코 베가는세상 이라지만, 밑천을 떼어 가다니… 좌, 우 두 놈 중에 한 명인데…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다는 것은 사람 사는데는 늘 존재 한다는 것을  배웠다.
군대란 국민의 안녕과 국가를 지키는 것이 제일의 덕목 인데 … 동료의 밑천을 가져가다니!
어디서나 동료를 슬프게 하는 인간들은 있게 마련인가 보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별일 아니다. 그래도 나는 건강히 잘 있고 그 친구들도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추억으로 남을 뿐이고, 그것이 또한 삶인 것을…
우리 모두 따듯한 가슴으로 따듯하게 보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