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남매의 웃음
정수는 만원 지하철 안에서 혹시 여동생의 작품이 구겨질까 봐 여간 어렵지 않다. 어제부터 독감으로 인한 고열로 오빠에게 부탁한 것을 들고 여자대학으로 향하고 있다. "오빠 이것 좀 내 친구 ‘수진’이에게 갖다 줘! 내가 연락해 놨으니 주고 오기만 하면 돼" 수진이는 집에 왔을 때, 두어 번 본적이 있는 아주 말쑥한 옷차림과 예쁘게 생긴 지연이의 단짝이다. 화장도 하지 않은 생얼굴이 요즈음 학생 같지가 않았다. 마지막 수업날인 오늘까지는 제출해야만 하는 졸업 작품이니, 아무리 쪽팔리는 일이 된다 해도 거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동생을 도와주는 일이라도, 등교 시간에 많은 여학생 속에 묻혀 들어가야 하는 것은 나의 젊음을 탓해야 할 만큼 싫으나 부탁한 것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형제라 해 봐야 부모님이 열심히 낳아 주신 지연이와 나 둘뿐이니 말이다.
이른 아침에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로 무리를 지어 지하철에 바삐 오르고 내리는 모습에서 그들에게서 근심, 걱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각 본에 의해 움직이는 잘 짜인 영화 장면 같기도 한 그 속에서 잠시나마 같은 모습으로 하루의 시작을 알린다. 많은 승객에 떠밀려 나온 지하도에는 화려한 색상의 옷들로 봐서 대학가 근처임을 알 수 있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왔을 때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도 각지에서 온 많은 여학생을 내려놓는다. 여기서부터는 그들과 함께 걷는 시간이다. "아이고 쪽팔려" 소리를 마음속으로 지르며 앞만 보고 걸으려 해도 좌우에 신경이 쓰인다. 어떤 애들은 요런, 미남을 알아보기는 하는지 힐긋힐긋 보는 게 그리 나쁘지는 않으면서도 말이다. 아마도 이 아침 시간에 여학교 들어가는 젊은 놈은 나 혼자인지 싶다. 학교 앞은 세련되고 이국적으로 꾸민 많은 상점이 이곳이 학교 앞 인지 쇼핑몰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아직도 네온이 꺼지지 않은 윈도에는 단정한 마네킹이 손짓하며 앳된 손님을 부른다.
드디어 학교 앞이다. 경비아저씨에 사정을 이야기하여 안내를 받는다. “이쪽으로 가다가 갈림길에서 오른쪽 계단을 오르면 두 번째 빌딩이에요.” “예, 고맙습니다.” 허둥지둥 인사를 하고 급히 비탈진 길을 오르다 보니 계단을 맞는다. 성큼성큼 계단을 거의 다 올랐을 때이다. 근데 갑자기 배가 이상하다. 어제저녁 회식에서 소주와 함께 벌컥벌컥 들이마신 생맥주가 기어이 사고를 친듯싶다. 아니면, 장만큼은 자신이 있는데 오늘따라 많은 여학생과 오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엠병할!” 중얼거리며 화장실을 찾아보는데 편하게 물어보려는 남자는 눈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몸의 신호는119를 부를 정도로 급하다.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다가 한곳의 화장실 사인을 보고 무조건 직행이다. 어휴! 조금만 늦었으면 갓난아기 시절로 돌아가야 했으니…
너무 급한 볼일은 들어가서 해결은 했는데, 옆을 보니 휴지가 없었다. 이런, 휴지가 없으니... “우라질!” 나도 모르게 나오는 욕을 참기에는 상황이 매우 급하다. 아차! 이곳은 여자 화장실이 아닌가. 그래도 다행히 옆집 사람이 있어 천만다행이다. 호흡이 가빠오는 숨을 여러 번 가다듬고서, 에라 모르겠다. “저~ 휴지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잠시 후, 옆집에서 칸막이 밑으로 휴지가 굴러왔다. “감사합니다.” 그때의 나의 심정은 감사 하다는 말을 수 십 번 해도 부족 하지 않았다. 볼일을 끝내고 나와 세면대에 섰다. 가쁜 호흡을 진정하고 물을 틀었을때, 그녀도 볼일을 다 마친 듯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이 열렸다. 곧 거울에 비친 얼굴이 어디선가 본 듯한… 다시 굳은 눈을 하며 뚫어지게 거울을 보니, 헉! 이럴 수가! 그녀는 지연이의 친구 ‘수진’이다. 눈에 힘을 주어 다시 한 번 거울을 보아도 생얼굴에 ‘수진’인것을... 거울 속에서 마주친 수진이의 얼굴도 빨개지고, 나 역시 몹시 당황스러워진다. 내가 “밖에서 기다릴게” 하고 들릴락 말락 한 모깃소리로 말하고 손을 씻는 둥 마는 둥 하고 얼른 나왔다.
아직 가시지 않은 분홍빛 얼굴로 "오빠" 어떻게 이곳으로 왔어요. 바로 건너에 남자 화장실이 있는데... 응 그게 말이야 좀 급해서 잘 안보였거던... 수진이와 나는 멋쩍은 웃음을 웃었지만, 그때의 기분은 생에 처음 느껴보는 야릇함 이었다. “이거 지연이가 부탁 한거다” 하며 건네주고 쏜살같이 계단을 내려왔다. 회사에가서 오늘 아침의 일을 생각하니 다시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는 보험이 있다면 나에게는 첫 번째의 보험 상품이 되겠다. 온종일 울렁울렁한 기분으로 앉아서 일을 계속할 몸 상태가 아니다. 회사를 조퇴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연이는 독감에서 조금 회복된 듯 보였다. 야! 나 오늘 너희 학교 갔다가 망신만 톡톡히 당했다. 짧고도 너무 길었던 시간을 이야기해주면서 조금은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내게 다시는 그런 일 시키지 마! 절대, 절대로 알았지? 누워 있던 지연이는 벌떡 일어나 뭐가 우스웠던지 한참 깔깔대고 웃는다. “아니 수진이가 옆에 있었다고?” 호호 하하 "오빠! 내 덕분에 여자 대학교 화장실도 들어가 봤잖어”... 호호 하하…
”아이고! 그래 호호 하하다.” 하며 동생의 귀싸대기를 살짝 건드렸다.
p.s. This story is fiction.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후속편은 언제? 기대가 되네요...^^
소설속의 지연씨의 올케가 혹시 XXX님 아닌가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