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십 년간 다니던 병원의 단골(?) 의사분도 세월 앞에는 누구나 다 같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이 은퇴를 하였다.
예전에는 의사분이 지긋한 나이에 경험이 많은 분을 선호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욕심이었고, 나보다 십여 년 적은 나이가 좋을 듯싶다. 병원의 의사 목록에서 선택해야겠는데 언어 관계로 한국 분을 찾다보니 어렵사리 여자 분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여자분한테 가슴을 내민다는 것이 게면적기도 하지만 선택이 없었다. 예전 한국에서는 주로 산부인과 의사가 남자 분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리 멋쩍은 대면도 아니리라. 그래도 한국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분이라 언어에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었다.
드디어 검진의 날이 왔다. 이성에게 처음 진료를 받는 날이라 자그마한 방에서 서먹하고도, 검연적은 마음으로 기다린다. 누구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게는 늘 초조함으로 다가오곤 했는데, 진료실에서 의사를 기다림이란 초조함 이상의 그 무엇이 나를 두렵게도 한다. 십 여분이 지났을 때 간호사인 듯한 분이 들어왔는데 그분이 의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의사라면 늘 흰 가운을 입은 사려 깊고 점잖음을 연상케 되는데, 그저 평범한 간호사의 차림세이다.
늘 권위적인 것에 익숙 해져 있던 나는 아직도 그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사람들은 첫인상에서 선입견을 품는 경향이 있는데 버려져야 할 관습인데도 잘되지 않나 싶다.
당연히 한국어를 잘할 줄 알았는데 뜻밖으로 영어권이다. 그저 다섯 살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언어의 부담은 느끼지 않으리라고 선택을 했었는데 조금 긴장이 되었지만, 귀동냥으로 들은 영어로 대화하니 의사표현은 가능해서 다행이다.
컴퓨터로 나의 진료 이력서를 보더니 "please wait!" 하고 나간다. 잠시 후에 들어와서 '파상풍'에 대한 것이라고 어깨 부근에다 주사를 꾹 놓는다. 어떻게 왔느냐고 하기에 "Push up"을 과하게 해서 그런지 왼쪽 갈비뼈 부근에 통증이 심하다 했더니, 청진기로 호흡과 더불어 위와 좌우로 손들기를 시키더니 별 이상은 없다고 한다. "애드빌"을 복용하고 한 5주 정도 지나야 완전히 나아진다고 한다. 며칠 동안, 큰 숨을 쉴 수가 없고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는 생활이었는데... 그 정도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온 김에 '대상포진'과 '백일해' 주사도 맞으라고 처방전을 끊어주면서 아래층에 가서 혈액검사도 하라고 한다.
아이고! 오늘은 제대로 걸린 날인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피 뽑는 것인데...
한번 채혈을 하면 가운데손가락만 한 것으로 다섯 통 식 뽑으니 이걸 또 감당해야 할 시간이다.
내 차례가 왔다. 상대는 곧 은퇴할 나이가 넘은듯싶은 할머니다. 늘 상대는 젊은 아가씨였는데 혹시 나처럼 약간의 수전증이 있기라도 하지 않을까? (나는 술자리에서 컨디션에 따라 젊은이에게도 두손으로 따르기도 한다.ㅎㅎ) 겁을 먹은 채 하얀 팔뚝을 내 밀었다. 늘 그래 왔듯이 고개를 돌려 시선은 반대편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취미인지 "피"가 나가는 것을 뚫어지게 보기도 하는 별난 취미도 있는데... ㅎㅎ
이게 웬일인가! 조금 전 의사가 놓아준 파상풍 주사 정도로 가볍게 처리해주신다. 그래서 사회생활에 경험을 중요시하는가보다. 또 한 번 나의 선입견은 무너지고 있었으며 여태껏 채혈한 중에 제일 고마웠다.
그 후 시간이 흘러 5주가 되니 예전과 같은 상태로 불편함이 없다. 그 의사에게 여러 가지로 고마운 생각을 하던 참에 $스토어를 지나게 되었다. 일부러 찾아가지는 않아도 우연히 지나 칠 때에는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는 습관이 있어서 그날도 시찰 중에 카드가 눈에 들어왔고, 땡큐카드를 집어 들었다. 집에 와서 막상 몇 자 적으려 니 "Thank you" 이외에는 문장을 만들 실력이 없다.
옆에 있는 아들 녀석에게 한자 쓰라고 하니 그 녀석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내 생각을 잘 설명하고 몇 자 적어 병원으로 보냈다. 그 후 일 년이 가까워질 즈음에 난데없는 딸꾹질로 고생할 때이다.
그 의사와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예전 의사 같으면 2, 3분에 끝날 사무적인 통화를 15분 정도 의사와 이야기하기는 난생처음이다. 그러고 보니 처음 진료에서 내가 떠나기 전, 건강히 지내라고 이야기했을 때. 어떨결에 나는 유 투~~ 하고 답했던 기억도 남는다.
그 하잖은 99전짜리 땡큐 카드가 이런 행복감을 돌려주다니 참으로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처음 만났던 여의사분의 친절하고, 배려 깊은 마음에 감사드립니다
기분좋고 재미난 이야기네요. 잘읽었습니다.
전에 다니던 회사의 남자 직원이 자기 의사가 한국여자라고
영어로 크리스마스 카드 내용을 나 한테 이메일로 써보내면, 내가 한글로 번역을 해준지 14 년째입니다.
이 남자는 정성스럽게 한글을 손으로 그려서 자기의사한테 크리스마스 카드와 작은 선물을 매년 줍니다.
저는 15 년씩나 본 담당의사나 치과의사 한테 아직도 카드 한장 안 보내 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