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되고 두려워졌다.
온갖 거적대기와 플라스틱 쪼가리로 채워지고 있는 선반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가?
구차하게 이 사연을 자세히 늘어 놓는 이유는 몸을 가벼이하고 단련하는 노력 없이
장비에 의지하려는 어리석은 글쓴이의 모습을 뒷사람들로 하여금 경계하기 위함이다.
작년 겨울까지 사실 나는 로드 바이크 구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동안 사용하던 MTB는 무겁고 속도가 느려 장거리 운행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를 추월해가는 미국 아줌마들을 볼 때마다
그것은 나의 허벅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장비 때문이라고 위안을 삼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봄이 오면 신모델을 구입하거나 이전모델을 저렴하게 구입할 생각을 하며
총알을 모으고 있었다.
문제의 발단을 돌이켜 본다.
지난 여름 장거리의 아픈 추억을 멀리하고
https://www.bayalpineclub.net/index.php?mid=membersonly_gallery&page=5&document_srl=714546
가끔 혼자 또는 베산에서 평온한 산행을 하던 나에게 유혹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다시 장거리를 도전해 봐야하지 않겠냐고.
조용히 잠자고 있던 나의 욕망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기름칠 안 한 중고차 같은 몸을 이끌고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어느덧 짐승 소리를 듣게 되었다
물론 짐승도 다 같은 짐승이 아니다.
무림에도 서열이 있다.
나는 그런 짐승 소리를 듣는 일파 중 끄트머리에서 빌빌대고 있을 뿐이다.
장거리에 익숙해질 무렵, 다시 유혹의 속삭임이 시작되었다.
백팩킹을 도전해 봐야하지 않겠냐고.
유혹이 아니라 나의 내밀한 욕망을 알아챈 이들이 단지 끄집어 낸 것일 수도 있다.
욕망은 내 부실한 실력이 아닌 장비로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어쩌면 내 느린 속도는 가방이 무거워서, 헤드램프가 어두워서, 어쩌면 물통이 무거워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낭 무게를 1 파운드 줄이고, 물통 무게를 1 oz 줄이고,
MSR reactor로 라면을 끓여 먹고 다니면 평속 2.5마일에서 3마일이 될 것 같은 환상이 생겼다.
자전거로 나를 추월하던 미국 아줌마의 튼튼한 다리가 아닌,
carbon frame 위 아름답고 찬란한 Specialized의 logo가 HMG의 푸대 자루 배낭과 겹치기 사작하였다.
IACTA ALEA ESTO. 주사위는 던져졌다.
백팩킹 장비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Craig Adams를 벤치마킹했다.
이 친구는 산도 잘 다니고 촬영도 잘 하고 인물도 좋다.
최근 몇년간 여자 친구가 서너 번 바뀐 것 같다. 장비빨일까 ?
아무래도 나와는 다른 종자인 것 같다.
그 외 베산에서 나의 롤모델인 XAB님, X해님, 저X님, 드XX님, 동X님, 베X님, X터님 등께 조언을 구했다.
https://www.bayalpineclub.net/freeboard/742666
이 분들은 조언 뿐만 아니라 각종 세일 소식과 물품 추천 또는 충동으로 나의 불타는 욕망에 계속 기름을 부었다.
어머니가 늘 좋은 친구를 사귀라고 하였거늘...
그러나 샛별님의 따듯한 한마디는 한정된 수입과 한없는 욕심, 價性比와 價心比, 생존과 안락, 可處分所得은 可妻憤燒得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에게 반짝이는 위안이 되었다.
다양한 사이트에서 각종 카드와 XX pay를 휘두르며 여러 order를 place하였다.
Place order를 clik할 때의 쾌감이란!
내가 자본주의 사회의 필요악이라고 그렇게 외치던 쇼핑몰이 이런 기쁨을 주게 될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계속 배달되는 정체불명의 박스들은 옆지기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다.
때때로 박스가 문 앞에 놓이면 눈치 채기 전에 증거 인멸을 시도하였으나 충분하지 않았다.
다 싸구려라고 둘러댔고 다행히 믿는 눈치다.
그럴 수 밖에. 옆지기 눈에는 그저 나일론 거적대기와 플라스틱 쪼가리일 뿐이다.
저 회색 포대기 속에 Loro Piana나 Montbell에나 들어 가는 수준의 goose down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또 촌스러운 태극 마크의 정체가 $500가 넘는 천막이고 요상한 플라스틱 통이 곰도 못 연다는 요물단지라는 것을 알면 기가 찰 것이다.
이것이 그 동안 카드질로 얻은 결과물이다.
정말 필요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구입했지만 분명 나중에 후회하며 처분할 것들이 생길 것이다.
Katadyn 정수기로 거른 물을 Nalgene 물통에 보관하다 MSR stove로 라면을 끓여 먹어도 배가 고플 것이고
광할한 공간의 Big Agnesa tent 안에서 R-value 4.2의 Xlite pad 위에 fill power 900의 quilt를 덮어도 여전히 추울 것이다.
360Lumen의 램프로 어둠을 헤치고 2.5 lb의 가방을 둘러 메어도 여전히 떨어지는 시력과 180 lb의 몸뚱아리는 헛발질을 할 것이다.
문 밖에서 옆지기의 발걸음이 들린다.
서둘러 글을 마무리한다.
일단 자리부터 확보하고 내용은 내일...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