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르 드 몽블랑 트레킹
TMB 8일간의 일정을 되돌아본다. 알프스의 풍경도 좋았지만, 산장의 식사와 시원한 맥주, 특히 사람들이 좋았다. 애써 인연을 만들려 하지도 않고, 자연스러운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의 경쾌한 담소. 사람들은 세뉴 산기슭의 들꽃을 많이 닮아 있는 듯했다. 바람 따라, 경쾌한 몸짓으로 춤추는 그 모습.
글 사진 · 이병로 미국 주재기자
“봉쥬르~ 봉쥬르!”
어느덧 마주치는 등산객과의 인사말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몽블랑 둘레길(TMB: Tour Du Mont Blanc)을 따르는 발걸음도 제법 속도가 붙는다.
TMB는 서부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4,810m)을 중심으로 알프스 산군을 한 바퀴 도는 트레일이다. 그 거리는 170km쯤이지만, 전통적인 트레일 외에도 변형루트(variants)가 산재하여, 자신의 일정이나 여건에 따라 구간과 거리를 맞춤할 수 있다. TMB 트레일은 그 지도상의 모양이 마치 물방울을 닮았다. 동서로는 U자형 빙하계곡인 샤모니(Chamonix) 계곡과 쿠르마이유(Courmayeur) 계곡을 따라 진행하면서,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3국의 국경을 지나게 된다. 몽블랑 둘레길을 걷는 동안 열 개의 고개도 지난다. 특히, 세뉴고개(Col de la Seigne, 2,511m)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 페레고개(Grand Col Ferret, 2,533m)가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국경, 그리고 발므고개(Col de Balme, 2,206m)가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이 되며, 샤모니 계곡과 쿠르마이유 계곡의 빼어난 경관을 만끽할 수 있다.
TMB의 몽블랑 산군은 문명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근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겨울동안 내린 눈과 빙하가 녹아 흐르는 개울은 산비탈을 타고 흐르며 초지를 형성하고, 끝내는 강을 이뤄 주민들 터전의 젖줄 역할을 한다. 또 겨울이 오기 전인 9월 중순까지는 산군의 산기슭 초지에서 소떼들이 방목되어 딸랑거리는 방울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몽블랑 둘레길을 걷다보면 이러한 목가적인 알프스의 풍경과 함께 빼어난 산군의 경치를 만끽하는 것은 기본이고, 이 외에도 몽블랑 둘레길 상에서 만나는 샤모니와 쿠르마이유를 비롯한 산악마을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는 점이 또 다른 매력이다. 그 외에도 10km마다 산재되어 있는 산장에서 숙박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어 편하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산객들과의 친교는 산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즉, TMB는 산과 사람 그리고 가축들이 공존하는 시공간 같이 다가온다.
모떼 산장에서 만난 시실과 스티븐
세뉴고개를 향하는 길목에 프랑스령의 마지막 산장인 모떼 산장(Refuge Motte)이 위치하고 있다. 몽블랑 산군 아래에서 맞이한 두 번째 밤은 예사롭지 않다. 산장 지붕을 떼 가려는 듯 밤새 강풍이 몰아치더니 아침이 밝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이 잦아든다. 거대한 빙하를 두른 빙하침봉(Aiguille des Glaciers, 3,463m)은 세뉴고개를 병풍처럼 감싸 안은 채 맑은 햇살이 비쳐든 모떼 산장을 굽어보고 있다.
“봉쥬르~” “봉쥬르~”
단잠을 취한 산객 모두 환한 미소로 인사를 나눈다. 채비를 마친 산객이 하나 둘씩 아침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모여들고, 시골 할머니 댁에서 맛보는 듯한, 잘 차려진 아침상을 대한다. 메뉴는 바케트, 홍차, 커피와 함께 곁들여지는 신선한 요거트, 치즈와 우유. 그 정성스런 아침식사를 정겨운 담소와 함께 이어가고, 오늘 하루 진행할 트레킹 정보를 서로 주고받으며 서로의 행운을 기원한다.
프랑스 군인으로 퇴역한 후 홀로 여행을 다니고 있다는 시실(Cicile)은 오후 날씨가 심상치 않을 것 같다며 서둘러 파우흐고개(Col de Fours, 2,533m)로 향한다. 전날 지나온 파우흐고개의 트레킹 상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 나는, 발바닥 치료에 사용하라고 알코올패치와 물집치료용 밴드를 여분으로 그녀에게 챙겨주며 인사말을 대신한다.
시실과 전날 저녁식사를 함께 했던 스티븐(Steven)이 그녀와 함께 파우흐고개로 향한다. 그는 미공군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오산에서 5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어 한국 실정에 해박했다. 그는 현재 프랑스 보르도에서 거주하며 여행업을 하고 있다. 모떼 산장에서 만난 시실과 스티븐 모두 자신의 현재 삶에 만족해하는 표정에서 그들 삶의 경쾌함을 간접적으로 느껴본다.
빙하 바람에 들꽃이 춤추는 세뉴고개
느긋한 아침을 마친 나는 모떼 산장을 나서 세뉴고개로 향한다. 세뉴고개까지의 도상 거리는 5km, 고도 600m를 올려야 한다. 세뉴고개를 넘어서면 이탈리아 땅이다. TMB에서 가장 고대하던 그랑조라스를 조망하며 걸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은 살짝 부푼다. 하지만 빙하침봉 아래로 펼쳐진 빙하를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오는 바람에 맞서려니, 코끝이 찡하고 눈이 아린다.
지그재그의 세뉴고개 오름길,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 수가 쌓여 갈수록 숨은 더욱 가빠지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바람은 연신 불어대고, 산기슭을 형형색색으로 점령한 들꽃들이 키를 낮추어 익숙한 몸짓으로 바람에 춤을 추고 있다. 거친 호흡을 토해내는 내게, 바람을 느끼며 리듬을 맞춰보라고 속삭이는 듯.
이내 걸음을 멈추고 들꽃 만발한 곳에 터를 잡고 앉아 땀을 식히며 이들의 향연을 본격적으로 감상한다. 노랑, 하양, 보라… 형형색색의 들꽃은 바람에 맞서지 않고 리듬을 타며 익숙한 그들만의 춤사위를 펼친다. 산기슭에서부터 계곡을 향해 거대한 꽃물결을 일으키며. “바람에 장단이라도 쳐줘야 할까?” 괜스레 흥얼거림이 입 밖으로 터져 나온다. 거대한 빙하 콘서트장에서 ‘빙하와 침봉, 바람 그리고 들꽃’이 들려주는 자연의 공연. <몽블랑, 바람의 노래>에 얼마나 취해있었을까? 어느새 등줄기의 땀이 식어 서늘함이 느껴지고서야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한다.
세뉴고개에 다다르니 제법 많은 산객이 삼삼오오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먹고 있다. 빙하침봉이 바로 눈앞에서 하늘을 찌를 듯 우뚝하고, 널찍한 세뉴고개 정상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국경을 알리는 표시석이 장승처럼 서 있다. 스위스에서 왔다는 안나(Anna)와 매트(Matt)를 만나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이탈리아 구간의 쿠르마이유 계곡을 향해 하산길을 동행한다. 안나와 매트의 그룹은 산행동아리로, 자주 알프스 인근을 백패킹 한단다.
“안나, 매트! 알프스 산군은 어떤 특징이 있지요?” 그들이 느끼는 알프스가 궁금해 물어본다.
“알프스 산군은 폭이 좁은 편이고, 벽처럼 가파르게 서 있습니다.” 매트의 짧은 설명대로 몽블랑의 산군은 깎아지른 침봉들이 둥그런 몽블랑을 호위하듯 남북으로 길게 서 있는 형상이다. 그 경사가 가파르고, 산군의 폭이 좁은 편이라 산군 내에는 호수가 형성되기 어려운 지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얘기를 하며 내려오다 보니, 어느덧 쁘티 몽블랑(Petit Mont Blanc, 3,431m) 아래 위치한 엘리자베타 산장에 이른다. 잠시 목을 축이고 휴식을 취하며 안나와 매트 그룹의 일행과 인사를 나눈다. <사람과 산> 월간지에 실을 단체 사진을 찍자고 하니, 다들 신이 나서 환호성을 외친다.
저녁놀과 무지개를 걸친 몽블랑
TMB 4일차. 고풍스런 쿠르마이유 시내를 지나 베르토네 산장(Rifugio Bertone)으로 오르는 중이다. 전날 랜도네 산장(Rifugio Randonne)에서 함께 묵었던 릴리앙(Lilian)과 줄리(Julie)가 나를 부르며 환한 웃음으로 반겨 준다. 프랑스 서부에서 왔다는 21살, 22살의 씩씩한 청년들이다. 무릎에 이상이 생긴 릴리앙에게 지압과 약을 발라주고, 배낭착용 조절을 해주었더니 고마워한다. 오후에 비소식이 있어 비가 내리기 전 베르토네 산장에 당도하기 위해 서둘러 오른다.
오후 2시경, 예보대로 억수같이 비가 쏟아진다. 체온이 떨어진 릴리앙과 줄리에게 미역국을 끓여주고, 운행계획을 수정해 오늘은 베르토네 산장(Rifugio Bertone)에서 묵도록 권유한다. 아마도, 베르토네 산장을 지나 보나티 산장으로 향한 산객들은 여지없이 비를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녁 8시경, 그칠 줄 모르고 쏟아 붓던 비가 그치고, 보물을 감싼 베일이 벗겨지기라도 하듯, 몽환적인 몽블랑의 모습이 드러난다. 저녁노을이 번지면서 빛의 우주 쇼가 펼쳐지는 가운데, 한편에선 무지개도 얼굴을 내민다. 상상 못했던 전경에 모두들 빠져든다.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탄성과 함께 저마다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쁘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몽블랑과 그 주위 침봉엔 길게 잔 구름이 걸쳐져 있고, 낙조의 붉은 기운이 알프스를 물들이고 있다.
“와우~” “와우~” “어메이징~” 여기 저기 터지는 감탄. 이토록 축복받은 풍경이 펼쳐지는 알프스 몽블랑. 마치 이곳은 이 세상의 중심인 듯 모든 빛과 색이 내가 서 있는 곳으로 수렴되는 느낌이랄까?
그랑조랑스와 빙하를 따라 페레고개를 향하여
TMB 5일차.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다. 스위스 라폴리(La Fouly)까지 페레고개를 넘어 37km를 운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풍경을 놓치고 걷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그랑조라스를 조망하며 걷는 오늘의 구간이 TMB의 백미라 생각하기에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전날 비가 온 뒤라 시계는 더더욱 맑고, 하늘은 청명하여 구름 한 점 없다. 변화무쌍한 산악날씨 속에 이렇게 맑은 날씨를 주시다니! 알프스 여신의 배려에 부응해야 하니 여유롭게 그리고 집중하며 걸으려 한다. 거친 호흡에 생각이 매몰되지 않도록 심장 박동보다 느리게, 느리게 발걸음을 옮기며, 다가오는 감동과 여운을 길게 연이어 간다.
보나티 산장까지는 7~8부 능선을 따라 제법 평탄한 길이 이어진다.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고 안정을 유지한 채 명상하며 소요하기 좋은 구간이다. 알프스 대지 여신의 숨소리를 들으려 숨을 죽이고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기며, 온전히 땅의 기운을 느끼며 걷는다. 내 속도와 호흡에 맞춰 뾰족뾰족 솟은 그랑조라스의 침봉이 좇아오고, 침봉의 어깨에 걸쳐진 빙하의 푸른 속살 사이로 빙하가 녹은 물줄기가 작은 폭포를 이루며 떨어진다. 이 폭포수는 발아래 쿠르마이유 계곡을 가로질러 강물이 되어 흐른다. 소떼의 딸랑거리는 방울소리가 그랑조라스의 고요한 아침을 깨운다. 이 순간과 이 느낌을 온전히 온몸의 기억에 담아 두고두고 기억 속을 걷고 싶은 곳이다.
예리와 미르를 만나다
스위스 포흐클라즈고개(Col de la Forclaz)에 위치한 산장에 이르렀을 때, 맞은편에서 자신의 몸집만한 배낭을 메고 골든 리트리버(미르)를 끌고 오는 미국 처자를 조우한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 출신인, 용감하고 에너지 넘치는 26살의 처자 예리와 그녀의 호위무사인 5살의 미르는 11일째 함께 하이킹 중이라고 한다. 예리와 미르는 트리엥(Trient)의 르쀼티(Le Peuty) 캠프장으로 향하는 길이라며, 나를 지나 터벅터벅 오솔길로 사라진다.
포흐클라즈 산장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고 나니, 세찬 바람과 함께 억수 같이 비가 쏟아진다. 이 비바람 속에서 예리와 미르가 별 탈 없이 밤을 보낼지 걱정이다. 아침에 서둘러 르쀼티 캠프장으로 넘어가서 예리와 미르가 무탈하게 밤을 보냈다는 말에 안도한다. 장박 백패킹 경험이 일천한 가운데, 20kg 넘는 배낭을 메고 고산을 오르내리는 그녀의 열정이 대단하다. 그 마음이 대견해 보인다.
“예리, 무엇이 너를 이곳까지 이끌고 TMB를 계속할 수 있게 해주는 거니?” 나의 호기심 어린 물음에 우문현답 격인가, 그녀의 답은 간결하다.
“그냥, 미르랑 유럽여행을 계획했는데, TMB가 안전하고 좋다고 하니 유럽여행 일정에 포함시켰어요.”
“배낭이 너무 무겁고, 힘들어서 남들 보통 운행속도보다 많이 느려요.”
“매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하루 운행 마친 후 쉬고 나면, 다시 할 만한 것 같고….”
“며칠 동안 걷고 나니 그동안 한 것이 아까워서 중간에 포기를 못하게 되었어요.”
평범한 답변 속에 그녀의 굳은 심지가 느껴진다.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 모습에서 그녀의 진취적인 삶의 태도가 나타난다. 발므고개까지 함께 산행한 후 발므산장에서 그녀와 미르의 TMB 종료를 축하해 주며, 안전한 여정을 기원하는 덕담을 주고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