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행을 마치고 귀국을 하는 비행기 안에서 끄적거려 본 글을 공유해 봅니다.)
<창칼 6> 개고생 vs. 꿀고생
행복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끄는 주제도 많지 않을 것이다.
누구는 사는 목적이 행복이라고 하고 누구는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도 한다.
행복이 뭘까하는 정의도 다양하다.
쾌(적)감이다, 만족감이다, 느긋하고 여유에서 오는 넉넉함이다, 자기 실현을 통해 얻어지는 성취감이다, 등등…
최근에 Happiness is antifragile이라는 말을 접했다. 무슨 뜻일까? Nassim Taleb라는 저자가 본인의 책에서 도입해서 퍼트린 개념으로 행복은 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란다. 오히려 도전과 역경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이고 또한 이런 도전은 사람을 더 강하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싱거운 소리일 수도 있다.
20년 전 쯤에 인상 깊게 보고 내 뇌리에 아직도 남아 있는 미국 PBS 방송 다큐가 있다. 행복이라는 주제로 하버드 심리학 교수의 연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다큐는 극단의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 내용들이 포함되었다. 그들이 겪은 과거의 고난과 역경이 현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었다는 취지의 내용이다. 불치의 암을 극복한 사람, 월남 포로 수용소에서 15년 동안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미군 장교, 등등.. 이들은 하나 같이 다시 태어난다면 똑같은 경험을 피하지 않고 다시 할 것이라고 자백하는 부분이 흥미로웠다. 그만큼 그들의 큰 역경이 이후의 삶을 의미있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예상하는 답이지만, 큰 반전은 3부작 다큐가 다 끝나는 지점에서 나온다. 다큐 제일 말미에 하버드 심리학 교수가 등장하여 우리 뇌는 자기 합리화를 잘 하는 기제가 있는 것과 이 고난의 투사들의 행복관도 어쩌면 뇌의 신경생리학적 반응으로 인한 자기 합리화의 기제 결과가 아닐까하고 추정하면서 다큐가 막을 내린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약간 허망하면서도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우리의 고상한 가치 추구 경향이 단지 합리화를 하는 생리학적인 뇌의 작용이라니.
이거와는 맥이 다르지만 비슷한 결과의 심리학적인 실험도 있다. 한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차가운 물에 손을 1분동안 담그게 해서 반응을 묻고, 다른 한 쪽에 사람들에게는 1분 동안 찬 물에 손을 담근 다음에 30초 동안 미지근한 물에 손을 담그게 한 후에 그들의 반응을 물었다. 이때 후자의 사람들이 불쾌감을 덜 호소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유쾌한 경험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1분 동안의 차가운 물에 노출은 똑 같으나 마지막 경험이 전체 느낌을 달리 했다는 것이다.
이런 신경생리학적 실험과 연구들을 보면서 내 나름대로 우리의 경험을 고찰해 본다.
백팩킹이 아주 힘들더라도 결국 해 내면 큰 보람이요, 행복한 경험으로 기억할 것이고, 중간에 포기해서 돌아왔다면 헛고생만 하다가 돌아왔다며 행복한 경험으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즉, 같은 경험이라도 그 과정의 말미의 상황에 따라 ‘개고생’이거나 ‘꿀고생’이 되는 것이다.
이런 원리가 호르몬의 작용에도 나타나는 것 같다. 최근 유툽을 통해, 스탠포드 대학의 뇌과학자가 찬물 샤워가 왜 엄청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지에 대해 분석하는 내용을 전했다. 실은 건강 유지를 위한 찬물 샤워에 대한 연구와 관심이 최근 들어 증폭되고 있기에 이 현상에 대한 설명을 주기 위함이기도 하다. (https://youtu.be/xo2ZCT_UOtM). 이 신경생물학자, 앤드류 허버만 (Andrew Huberman)에 따르면, 찬물 샤워 시 (혹은 냉수 입수 시) 도파민의 분비가 코카인의 효과와 맞먹는다는 것이다. 운동이라든지 남녀 간의 사랑 나눔의 그 도파민 효과가 최고로 봐야 2라고 한다면 찬물 샤워는 그 수준이 2.5라고 하니, 가히 그 효과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다시 말해, (찬 겨울에 하는) 찬물 샤워야 말로 어쩌면 꿀고생인 셈이다.
도전이 많은 우리의 산행도, 백팩킹도 바로 이러한 원리로 보면 모두 꿀고생이기에 오늘도 우리 산악회 산우님들은 열심히 도전장을 내는지 모른다.
우리 삶에도 엄청난 꿀고생들이 주변 도처에 널려 있고 우리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같은 경험이라도 그 결과가 개고생이 되거나 꿀고생이 되는 건 결국 우리의 관점의 문제로 귀착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지점에서 젊은 시절에 많이 회자했던 '일체유심조'라는 말도 언뜻 생각난다.)
뻔하디 뻔한 내용일지 모르지만 과학적인 원리와 근거 덕분으로 추상적인 개념들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는, 아주 흥미로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