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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칼 19> 짜라퉁은 이제 짐 싸고 물러가라!

by 창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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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칼 19> 짜라퉁은 이제 짐 싸고 물러가라!

부제: 지혜완성의 핵심 매뉴얼(= 반야심경)과 자연과학의 만남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 : 반야 = 지혜; 바라밀 =완성; 심 = 핵심; 경 = 메뉴얼)

 

최근에 양자 물리학, 상대성 이론, 우주과학, 그리고 뇌과학의 접목점을 얘기하는 강연을 듣다가 ‘존재는 실체가 없고 관계(성)만이 있다''라는 믿기 어려운 엄청난 주제(링크)를 접하게 되었다.
 
우리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데 실체가 없다니. 그럼, 물질 같은 현상계에도 (관계성만 있을 뿐) 존재가 없다는 소린가? 
 
마음 속에 강한 반문이 일어난지 몇 초도 안돼, 아뿔사!  과거 20대 중반 때, 라즈니쉬가 강해한 반야심경 해설서를 읽는 과정에서 그 자리에 한 동안 얼어 붙었던 기억이 올라왔다. 조금은 막연하기는 하나 존재의 핵심을 궤뚫은 것 같은 느낌과 함께 환희 속에 내가 사라지고 시간이 멈춰버렸던 기억. 
 
이후 지난 30년을 살아오면서 반야심경에 관한 다른 버전의 강연이나 해설서 등을 못해도 30여편 이상을 접하면서, 이 오래된 경전이 세상의 어떤 가르침보다 가장 심오한 무엇을 가르키고 있다는 것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느낀 바도 있었다. 이전 글에서 펼쳐본 니이체적 초인의 진리(링크)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과 함께
 
그럼, 이 짧고 오래된 반야심경 텍스트의 그 멈출 줄 모르는 감동과 지혜의 향기는 어디에서 오고, 그 핵심 메세지가 최신 양자물리학우주과학, 뇌과학 등의 발견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짚어보자. 
 
우선, 응축적으로 말해서, 앞에서 얘기한 ‘우주에  존재는 없고 관계만 있다는 것’의 뜻은 이렇게 이해를 했다. 
 
최신의 뇌과학, 양자역학, 상대성 이론과 우주 과학의 불락(Block) 시간 이론에 따르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없고, 시간이 흐른다는 것도 우리 의식의 기능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으로 실제로 시간은 정적이고 흐르지 않는다고 한다. 더 나아가 나의 앞글 '별 이야기(링크)'에서 지적한 대로, 과거, 현재, 미래도 단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모두 같이 공존한다는 것과 시간 상의 순간이라는 것도 실체가 없는 것으로, 오직 관찰자가 개입했을 때만 일어나는 착각이라는 것이다. 즉, 시간적 순간이나 지금이 있다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간의 인식의 틀로 해석을 할 때만 순간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그 개념은 다른 동물들의 인식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로 지금이라는 순간은 종국적으로는 환상이고 같은 맥락으로 우리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존재조차도 우주적 관점에서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결론이다. (진화적으로, 우리 뇌가 실상을 왜곡해서 받아들임(=환상)으로써 생존과 번식을 잘 할 수 있는 순기능 때문에 우리는 계속 이런 환상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개념을 대표하는 인물로, 스웨덴 이론 물리학자 Max Tegmark는 “관찰적 순간이 주관적 시간성을 만들어 낸다.” 즉, 시간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와 그의 주관적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즉, 보편적, 객관적 시간의 실재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내가 원문으로 2번 독파한 책, 'The Order of Time (번역본 제목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의 저자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양자 물리학자인 Carlo Rovelli에 따르면, “시간 상의 순간은 없다”라고 한다. 시간은 단절된 순간의 합이 아니고 순간존재라는 개념은 시간과 공간 내의 사건들의 관계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 뿐이라는 것이다. 하여, 고정된 순간이 있다는 생각은 환상으로서, 이런 환상이 우주가 사물로 구성돼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고 주장한다. 이를 짧게 재해석하자면, 우주적 관점에서는 모든 사물과 생명이라는 존재는 배열 관계 (즉, 원자의 배열, 분자의 배열, 탄소의 배열, 아미노산을 배열 등등)에서 나오는 것에 불과하고, 어떤 것도 스냅샷으로 사진 찍는 것처럼 순간이나 존재의 고정적 불변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고, 모든 것은 여러 요소들의 배열과 상태만이 있을 뿐이다. 즉, 존재는 요소들의 관계이고, 일어나는 사건은 확률이고, 시간과 공간까지도 빛이라는 관계에서만 존재한다는 거대한 담론을 펼치고 있다. (거꾸로 말하면 빛이 없으면 시간도 공간도 없고 우리 의식이 없으면 또 시간이 없는 것이다.)
 
최신 뇌과학의 정보를 빌리자면, 우리가 '나'라고 느끼는 자아 의식도 환상인데, 진화적으로 보면, 생존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아주 유용한 환상이라고 한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 책에서 지적한 대로) 인류는 서로 공유하는 이런 환상 혹은 허구를 이용해 관습, 종교, 문화를 만들내고 또 거대한 문명까지 이뤄왔으니 말이다. 이런 자아 의식이 환상이라는 것은 불교 철학의 모든 것은 (독)자성이 없다는 ‘무아 사상’과 일치한다
 
그럼, 이런 자연과학 발견과 통찰이 어떻게 반야심경의 핵심과 맞닿을까?
 
한자로 260자에 밖에 안 되는 이 짧은 경에는 엄청난 메시지들이 들어 있어 그것을 다 풀려면 책 한권도 나올 수 있으니, 가장 핵심적인 부분만 발췌해서 풀어볼 요량이다. 생소한 분들은 이것을 알면 “오늘부터 삶의 향기가 달라질지 누가 알어?”하는 심정으로 읽어 주기 바란다.  
 
이 경은 먼저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그는 관자재(=관음) 보살이다. 관자재(觀自在) 보살은 어떤 것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걸 자유자재하게 관찰해서 꿰뚫어 보는 눈썰매 좋은 스마트한 스승이다. 
 
(관자재 보살), 조견오온 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 皆空 度一切苦厄)
(조견오온: 비추어서 다섯가지 뭉쳐진 감각/지각 과정을 본다; 개공: 모든 게 비어 있다; 도일체고액: 모든 고통과 액을 넘어선다)
 
지혜로운 스승 관자재 보살이 명상을 통해 가만히 고요히 비추어서 마음을 관찰을 해 보니, 다섯 가지의 몸의 감각과 다섯 가지의 사고 인식 작용이 다 고정시킬 실체가 없고 텅 비어있는 것 (즉. 모든 것은 관계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모든 삶의 스트레스와 고통에서 벗어났다. 즉, 마음의 대자유를 얻었다. 
 
과학적 관점에서 다시 얘기하면, 어떤 물질도, 감각도, 인식도, 사고 판단도, 관계성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기에 고정된 실체를 잡을 수 없고 고정시킬 수 없다. 순간 순간 변해가면서 관계성 안에 역동적으로 파동치고 움직여 갈 뿐이기에 마음 속에 고정켜서 형상화하거나 붙들어맬수 없고, 따라서 고민하거나 고통스러워할 대상이 없다. 예를 들어, 오직, 환상과 착시로 고정시킬 때만이 고민할 대상이 생기는 것이다. 
 
이 핵심으로 보면 우리 존재도 그냥 변해가는 움직임이지 순간에 포착되는 어떤 존재가 아니다. 즉, 정지 화면처럼 순간으로 포착할 때만 존재가 있는 것처럼 보여질뿐 실상은 그 흘러감과 하나가 되어 파동쳐 나갈 뿐이다. 그래서 더나아가 '나'라는고정된 에고의 실체도 사라진다. 하물며, 고통스럽다는 온갖 감정이나 인식, 판단 작용도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 물질계, 현상계;  공: 비어있음; 고정되게 규정될 게 없음)
 
모든 (느끼고 보이는) 존재와 물질(=색)은 고정돼 있다고 규정할 것이 없고 (즉. 관계적 실체이기에 비어있고), 반대로 비어있는 것 (=관계성, 즉, 공)은 곧 존재 혹은 고정적 물질(=색)로 발현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깨달음의 결과로써 평정, 자유함, 마음의 유연함 같은 여러 가지 강력한 심리적 혜택이 발생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정서 중에서 가장 기본이되는 강력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즉,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무유: 있지 않다; 공포: 두려운 마음) (원리: 멀리 떨어져 나간다;  전도 몽상: 도착된 꿈같이 허망한 생각들 = 망상)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가 없고 관계성에 의해 빚어지는 인식의 결과라는 깨달음으로) 마음 속에는 어떠한 두려움, 주저함이 없으니, 이를 통해, 전도몽상 같은 망상, 즉, 꼰대같은 고착된 시각, 고집, 아집, 편견, 고정관념, 착각과 환상 등에서 벗어나서 마음은 유연해지고 대자유를 얻는다. 
 
반야심경의 핵심을 불교 철학적으로 정리하자면, 모든 것은 보고 느끼고 판단하고 의지를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인 마음의 작용에서 비롯되는 것과 이 과정의  실체는 즉 관계성, 결합성, 연기성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고정불변한 것이 없음을 깨닫고(=공함을 깨닫고), 보여지는 세상도 내 마음을 어떻게 작용시키느냐, 즉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결과 값도 달라진다는 거대한 유심론적, (즉, 현대식으로 말해서) 심리학적 이해를 갖게 된다. 이러한 이해와 통찰 (혹은 지혜)로써, 우리는 대자유의 안목을 갖고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게 이 반야심경이라는 거대한 텍스트가 가르키려고 하는 핵심 메세지인데, 이게 나온지 2천5백년이 흘러 자연과학의 거의 비슷한 담론을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점에 와서야, 시간이 환상이고 존재와 사물이 환상이라는 것을  겨우 알아차리고 있는데 , 어떻게 과학적 안목이 없었던 2천5백년 전에 이런 고도의 혜안과 안목을 직관으로만 파악하고 깨달을 수 있었던 말인가? 그 탁월한 직관력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정보와 지식이 발달과 함께, 급격하게 진화하는 우리의 뇌가 신경 다발이 더 발달을 해서 이런 안목이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곧 오리라는 예감이 든다. 그 시점이 오면 ‘초인’ 나부랭이를 붙잡고 있는 우리 짜라퉁 도사는 이제 짐싸고 산을 아예 떠나야 할 지도.
 
 
Albert Einstein quote: Time is not at all what it seems. It do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