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칼 25> 나는 몸이다!!
(부제: 몸의 노래 - 몸의 철학)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두 번의 큰 위기가 있었다.
하나는 고등학교 때 장기간의 수면 부족으로 몸이 그냥 무너져 버린 일이 있었다. 6개월 이상을 잠을 거의 안 자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결과는 망신창이가 된 몸이었다. 돌아보면 내자신의 큰 과욕이 있었고 또 과열된 입시교육의 한 희생양이기도 했다. 결국, 학업을 지속할 수 없어서 학교를 쉬어야 했고, 이 후로 몇 년간의 굴곡진 인생 여정으로 쓰디쓴 경험들을 겪어야 했으며 이로 인해 나의 삶의 방향도 완전히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군대에서 부상을 당하여 제대 후에도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그야말로 통증으로 가득찬 생활이었고, 그 고난의 강도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당시 수영을 포함한 꾸준한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공부를 포기하고 귀국했을 것이다. 이 기간에 운동만이 유일한 진통제였고 활력을 찾아주는 에너지원이자 구원자였다.
책을 써도 모자랄 파란만장한 경험을 두 단락으로 짧게 줄여 보니, 생생한 감회가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역경을 통해 내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나는 몸이다”라는 것이다. 아무리 정신이 중요하다고 해도 몸이 훼손되거나 정상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우리는 혼란과 절망에 빠지게 된다. 온전한 몸이 없을 때, 우리는 존재의 의미도 가치도 잃어버리고 정신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체험을 통해, 온전한 몸을 지키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인식이 내 삶을 지배해 왔다. 몸에 대한 나의 관심과 사랑, 열정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운동과 관리로 통증을 극복해 온 세월들이 나에게는 몸을 지키고 다져나가는 항해의 등불과 키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인류가 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간략히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몸과 정신을 하나의 통합체로 보는 사상가들이 있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아리스토텔레스와 히포크라테스이다. 이들은 몸과 정신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건강한 삶을 위해서는 몸과 정신 모두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철학의 아버지인 플라톤(Plato)은 이와는 다른 심신이원론을 구성하였고, 이에 바탕을 두고 발전한 주류 서양사상과 종교들은 몸을 욕망의 근원이라 여기며 금욕과 억압의 대상으로 보고 철저히 부정하고 폄하를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기독교 사상을 들 수있다.
기독교 정신에 이어, 서양 문명의 이런 이원론적 기반을 더욱 강화시킨 것은 16세기 쯤에 데카르트(Descartes)라는 철학자가 등장하면서였다. 이 이후의 서양사상의 근간이된 합리주의의 사상에 힘입어 몸과 정신이라는 이분법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이는 몸을 지배하는 것은 정신이라는 인식을 낳았고 이러한 사고는 현대 서양의학의 뿌리가 되어 몸을 정신의 하부 구조로 보고 마치 기계 다루듯이 몸을 대하는 전통이 이어져 오게 된다. 몸을 함부로 다루거나 학대를 하는 악습들이 행해져 온 것도 이런 사상의 영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들어 이런 심심이원론적 사상들을 단칼에 베어버린 인물이 니이체(Nietzsche)이다. 중세와 근대까지의 서양사상을 지배하던 기독교 정신과 데카르트적인 합리적 이원론을 비판하는 가운데 니이체는 위버멘시의 초인정신과 몸의 생명사상을 가지고 몸의 생명력과 소중함을 부활시켰다 (아래댓글 참조). 비슷한 시기에 심신의학(psychosomantics)이라는 개념이 나와서 정신과 육체의 상관성 개념에 입각하여 정신이 몸에 미치는 혹은 몸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들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심신의학은 현대 의학에서 중요한 분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몸과 정신의 통합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한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한편, 데카르트에 의해 설정된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은 또 한 명의 인물로, 20세기 초에 메를로 퐁티(Merleau-Ponty)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등장하였다. 그는 “체화된 마음(embodied mind)”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 몸의 중요성을 주창했다. 즉,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지각 경험을 통해 형성되며, 따라서 그 지각의 핵심인 몸이야 말로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동양의 요가와 불교 철학 뿐만 아니라 한의학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게 되고 후대의 심리학, 교육학, 인공지능, 로보트학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래 댓글 참조).
한 때 내가 몸 담았던 인지언어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이 이론에 따라서 비유 언어를 연구해 본 적이 있는데, 감정 표현들이 신체에 의지해서 발현되는 패턴이 여러 언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어에서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가슴이 덜컥하다, 간이 떨린다, 오금이 저린다, 소름이 돋다 등등의 신체 언어를 동반한 환유의 언어와 겁을 먹다, 두려움을 삼키다, 무서움을 떨쳐버리다 같은 수많은 은유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가 찾아낸 두려움의 환유와 은유 표현만 해도 100여 개가 넘는다. 이는 영어를 포함한 다른 언어에서도 비슷한데, 이를 두고 감정의 (신)체화(embodiment of emotion)라고 한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메를로-퐁티의 체화된 마음 개념과 유사한데, 일상에서 흔한 이런 비유 언어는 인간 감정의 뿌리가 몸에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몸과 마음의 밀접한 연결관계를 시사한다.
진화론적으로는 기억은 감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감정은 몸으로 구현된다. 처음에 감정이 많지 않았던 인간이라는 동물이 몸의 작용이 발달하면서 감정이 진화하게 되고, 상징적 언어가 출현하면서는 감정이 급속도로 풍부해진다. 즉, 인간은 몸 > 감정 > 기억 > 인지로 연속체로 진화를 해나가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슬픈 감정을 느낄 때 눈물을 흘리고, 행복한 감정을 느낄 때 미소를 짓는다. 다시 말해, 기억 (=인지), 감정 등이 몸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은 감정과 인지 발달에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것이다 (링크: 박문호 박사).
이와 같이 철학, 과학, 의학, 심리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몸이야 말로 우리 정신의 핵심이라는 논의가 상당히 이루어져왔지만, 여전히 우리는 정신을 주인으로 놓고 보는 근대 서양사상이나 주류 종교 사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도 우리의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 몸은 존재의 근거이자 정체성의 원천이고 자아실현의 도구임을 아무도 부정을 못 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가 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 존재의 근본이며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인 우리 몸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확신한다. 손가락이 들어올려지고 새 소리가 귀를 통해 들리고 무지개가 눈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 등을 항상 기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 몸의 모든 부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몸의 생생함을 잘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몸의 생생함을 유지하는 길은 몸에 대한 경시나 학대, 그리고 잔인함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몸에 대한 관심이 왜곡되어 몸을 과시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몸의 학대로 변질될 수 있다. 또한, 과식을 하거나 단맛을 좇아 단 음식을 몸속으로 쏟아넣는 것도 일종의 몸 학대라고 생각한다. 쉰다는 구실로 몸을 움직이지 않고 마냥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것도 몸의 경시를 넘어 학대라고도 볼 수 있다. 내 몸의 신진대사가 어디 하나 이상이 있다는 것도 내가 살아오면서 몸을 어떻게 대했는 지를 가르키는 바로미터가 된다.
반면, 몸에 적절한 좋은 스트레스나 고통을 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몸을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 적절한 움직임과 운동을 통해서만이 몸이 활기에 넘치고 살아나기 때문이다. 유명한 뇌과학자 폴 블룸(Paul Bloom)이 쓴 최선의 고통(Sweet Spot, 링크)이라는 책에서 나오듯이, 진정한 행복은 끊임없는 몸의 안락과 쾌감 추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가하는 몸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고통은 몸에 적절한 스트레스를 주는 건강한 운동이나 등산 같은 것을 말한다. (나의 이전글, "개고생 vs. 꿀고생" 참고, 링크)
주변에서 등산을 하지 않는 사람들한테서 왜 올라갔다가 내려 올 것인데 굳이 번거롭게 산을 오르냐는 물음을 자주 듣는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해 주고 싶다. 의도적으로 선택한 도전과 고통을 감내한 후에 오는 활력이야 말로 몸과 마음이 원하는 진정한 ‘찐’ 행복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