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는 북악산 팔각정이었다.
화창한 주말 봄 날씨에 어두운 집에서 뒹굴 수는 없었다.
아침 일찍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선글라스와 선크림으로 얼굴을, UV 차단 토시로 노출된 팔을 완벽하게 가렸다.
물안개가 피어오른 양재천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속도를 내기 시작하였다.
조용한 도시의 주말 아침.
일주일 중 유일하게 나를 위한 시간이다.
회사에서 복잡한 일, 부모님 건강, 사춘기 아이들과의 갈등 등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달린 자전거는 한강을 지나 중랑천에 들어섰다.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한강에서 중랑천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 상류에는 왜가리가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사냥할 물고기를 저울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평화로우면서도 긴장감이 깃든 묘한 광경이었다.
청계천에 지나 달리고 있는데 GPS가 처음 가본 길을 안내한다.
전에 팔각정을 갈 때는 남산을 넘어 경복궁으로 갔는데 이번에는 GPS에 운명을 맡기고 따라 가는 중이었다.
작은 하천으로 들어섰다.
‘여기가 어디지’ 하며 약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페달을 밟았다.
하천 양쪽의 산책 및 자전거길 축대는 최근에 지어진 듯하다.
전임 대통령이 청계천 정비할 때 여기도 같이한 것인가?
XX동. 그때였다.
축대 위 가게 간판에 낯익은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자전거 길은 Y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Y고 세느강이라 부르던 그 개천이었다.
점점 익숙한 동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문득 Y고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찾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조금 어려웠다.
아파트가 들어서 학교 주변 모습이 바뀌었으나 정문 앞 언덕길은 그대로였다.
길을 약간 헤매고 10대 때보다 가늘어진 내 허벅지로 자전거를 끌고 버겁게 올라갔다.
요새 학교는 외부인 출입을 막기 위해 문을 잠가둔다고 하는데 다행히 열려 있었다.
수위 아저씨에게 물어 보니 동네 교회에서 행사를 한다고 해 학교 운동장을 빌려주었다고 한다.
졸업생인데 잠깐 학교를 둘러보고 싶다고 하고 낯익은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운동장, 공부하던 교실, 물 마시던 수돗가, 그리고 강당이 보였다.
머리 속은 30년 전 시절로 돌아갔다.
공연 연습은 열심히 했다.
그래도 무대와 관객은 늘 긴장하게 만든다.
사모관대와 관복은 여전히 불편하다.
C 선생님이 인사 후 박을 펼쳐 드신다.
스르륵, 탁!
공연을 연습하다 친구들과 박의 쓰임새에 대해 흰소리를 늘어놓은 적이 있다.
저게 악기일까?
국악반 밖 친구들은 박은 왜 합주에 나오느냐는 질문에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지휘봉 쓰는 것 안 봤느냐고 했지만 우리도 그 정체에 대해 좀 의심이 있기는 했다.
어느덧 회상은 C 선생님 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C 선생님을 생각하면 역시 술이 먼저 떠오른다.
금복주라는 소주 상표의 달마대사(?)와 비슷한 표정으로 조금 많이 드시기는 하셨지만 항상 유쾌하셨다.
태어나서 처음 술을 마신 것은 공연이 끝나고 C 선생님 댁에서였다.
선생님과 같은 방에서 대작은 꿈도 못 꾸고 마당에서 서성이다 선배들이 따라 주는 막걸리를 한 잔 받아 마셨다.
동기 친구와 같이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그 때 처음 알았다.
나는 그다지 술을 못한다는 것을.
친구는 말짱한데 나는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버스 안 아주머니들이 고등학생이 술 먹고 돌아다닌다고 수근거렸다.
집에 오니 어머니가 바로 눈치 채시고 어디서 술 마시고 오느냐고 캐 물으셨다.
선생님 댁에서 한잔 얻어 마셨다니 “학교 선생님이 애들에게 술을 다 주고” 하며 아버지께 약간 힐나조로 말씀하셨다. 아버지 반응은 “뭐 그럴 수도 있지”였다.
선생님과 처음 상에 앉아 대작을 한 술은 히레사케였다.
대학교 1학년 때인가 낮에 선생님 댁에서 놀고 있는데 한 스님이 선생님을 찾아오셨다.
선생님께서 내게 술상 준비를 시키며 정종을 데우고 복어 지느러미를 태워 갖고 오라고 하셨다.
이해가 잘 안되었다. 안주로 복어 살을 드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지느러미를, 그것도 태워 달라니…
하여간 시행착오 끝에 들고 가니 태운 지느러미를 가루로 만들어 덥힌 정종에 타시는 것이었다.
신기하게 보고 있으려니 스님이 “너도 한잔 해라”라고 하신다.
선생님의 눈치를 보니 괜찮다고 하시는 것 같았다.
약간 비릿하지만 구수하고 입에 감기는 맛이었다.
한잔만 청하겠다고 하다가 어느덧 넙죽넙죽 잘 받아 마시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취기와 흥이 오르고 있는데 술이 떨어졌다.
스님이 내게 만원짜리 지폐를 한 장 주시더니 가게에 가 소주 2병과 안주로 스팸 하나 사 오라는 것이었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 들고 내 모습을 돌이켜보니 참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20 살 어린 놈이 낮술을 하다가 선생님과 스님을 위해 술과 고기 안주를 들고 벌건 얼굴로 주택가를 어슬렁거리고 있었으니…
선생님의 주량은 국악부 선후배들에게 늘 논쟁거리였다.
누군가 선생님이 소주 10병을 드신다고 하여 나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하였다.
그러나 그건 진실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우리는 선후배들과 어울려 국악 공연을 종종하였다.
가끔 합숙 연습을 할 때 선생님께서 격려차 술과 고기를 가지고 오셨다.
연습이 끝난 후 밤에 제자들에게 술을 건네주셨다.
주량이 약한 나는 금새 떨어져 잠이 들었다.
새벽 두 세시 경 잠이 깨니 선생님께서는 너댓 명과 여전히 드시고 계셨다.
솥뚜껑 위에 따 놓은 소주 뚜껑을 세어 보니 20여개가 넘었다.
다시 선생님께서 주시는 술을 받아 마시다 나는 또 잠들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소주 뚜껑은 40여개로 늘어나 있었다.
같이 마신 제자들의 소주병을 증언에 따라 아무리 합해도 10병 정도가 비었다.
제자들을 로테이션으로 제압하고 주무고 계신 선생님께 몇 병을 드셨는지는 여쭤보지 못했다.
내가 연주하던 악기는 대금이었다.
75cm 정도의 긴 대나무 관악기로 서양의 플룻같이 가로로 파지해 연주한다.
신라시대 전설에 전해 오는 만파식적이 이 대금의 원류라고 한다.
나는 대금으로 최신 유행가를 부르다 선배들에게 혼난 적이 있다.
국악부는 분위기가 좀 보수적이어서 악기로 국악의 클래식 같은 장르인 정악(正樂) 외에 음악을 하다가는 눈총을 받았다.
속으로는 ‘정악 중 대표곡인 수제천(壽齊天)도 백제 시대 어느 아내가 남편의 밤길을 걱정해 부르던 유행가라던데 현대판 남녀상열지사 노래인 유행가가 뭐 어떤가’라는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생각이 확신으로 바뀐 날이 있었다.
선생님 댁의 전구가 보름달 같이 보이던 날이었다.
그날 밤 선생님은 취기가 좀 오르신 듯 했다.
거문고 산조를 하시다가 ‘이것도 한 번 해 볼까’ 하시고는 괘를 옮겨 잡으셨다.
그리고 귀에 익은 노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나왔다.
골무 낀 손가락으로 괘 위에서 비브라토를 구현하시는 대목에 박수와 환호성이 나왔다.
대금으로 유행가 부르던 것은 관뒀다.
일정 분야에서 수준을 달성하고 다른 분야를 시도하는 것은 근사했으나 어설픈 수준으로 크로스 오버는 시덥지 않은 짓이었다.
어느덧 XX동을 내려왔다. 다시 GPS를 따라 자전거 방향을 잡았다.
성북동 고대광실 사이 언덕길을 올라 북악스카이웨이를 올라탔다.
허파와 허벅지가 터지는 것 같다.
숨이 넘어 가기 직접에 팔각정에 도착하였다.
자전거를 세우고 맥주 한 캔을 샀다.
파란 하늘 멀리 북한산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선생님께 한 잔을 권해 드렸다.
“나는 맥주는 별로야. 마시고 나면 배가 아퍼.”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 선생님은 맥주를 별로 안 좋아 하셨지... '
그 순간 갑자기 히레사케 한 잔이 간절히 마시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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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예전 고등학교 은사님의 생신이 단오였습니다.
풍류를 즐기시고 소탈한 인품으로 좋아하던 어른이었지요.
제가 히레사케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