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칼 37> 내 인생의 황금기
(The Golden Age of My Life)
짧지 않은 내 인생에 황금기(黃金期)가 있었다.
그것은 20대 중반을 막 넘은 스물여섯 살과 스물일곱 살에 이르는 1여년의 짧은 기간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 생활을 막 마친 때였고 유학을 오기 전의 시기였다.
그 때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고, 아무것도 이룬 게 없었다.
그런데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처음으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어디에도 매어있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보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쩌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나라는 ‘특정한' 정체성이 없었기에 그게 가능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기는 내 인생에서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인생에서 최초로 누구한테서 받는 이런 저런 간섭에서, 그리고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연연해야 할 어떤 관계에 놓여있지 않았다.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읽으며 자주 자주 내 자신과 마주 할 수 있었다. 정신적 여유와 함께, ‘소소한 것에서 확실한 행복을 느낀다'는, 소위 ‘소확행’의 맛도 알게 되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 때에 느꼈던 행복감의 비결은 각성을 통해 마음이 단순해지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 유유자적함에서 오는 단순함은 살아있는 많은 생물체들, 꽃과 나무와도 교감이 이루어지게 만들어주었고, 확장된 의식이 저멀리 우주의 파장을 감지하는 일까지도 생기게 했다. 이는 오감에 갇혀 작동하는 일상적 의식에서 벗어나서 비일상적 의식으로 나아갈 때 누구한테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더 나아가, 몰입과 명상의 시간들을 통해 시간이 정지하고 내가 사라지고 오직 <여기>외 <지금>만이 존재하는 체험도 자주 했다.
이렇게 행복은 뭐가 있어서, 뭐를 이루어서, 뭐가 됨으로써, 혹은 어디에 가 있음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바로 처해 있는 그 자리에서 의식의 변화로만도 가능하다는 것을 그 때 처음으로 진하게 체험하게 됐다. 하지만 이후에 더 큰 만족과 성취 그리고 행복을 찾아 여러 경로를 거치는 여정을 걸어왔건만, 그 20대 때 체험한 여여(如如)한 정신적 여유와 자유는 결코 다시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국에 오기 전이든 미국에 온 이후에든 늘 뭔가로서의 신분과 역할이 있었고 유학 생활 후에는 사회인으로서 직장 생활로 점철된 시간들을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그 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는 것을 이제 와서는 확연히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럼, 그 행복을 가져다 준 마음의 단순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1) 무엇보다도, 그 당시 의식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준 정신적 스승들을 책에서 만날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그리고 그 만남들은 의식의 혁명을 일으킬정도로 강렬하면서도 임팩트가 컸다.
2) 당시 유학을 준비하면서 고향 부모님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군복무를 마친 성인으로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학 준비라는 구실로) 이에 대해 어떤 심리적 압박이나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되는 조건과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3) 이런 가운데 굳이 다른 행위 없이도, 단순히 책을 읽는 과정에서 몰입과 깨어있는 의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4) 의식의 확장이 일어나면서 일상 생활이 우리의 의식을 얼마나 축소키는지에 대한 각성도 일어났다.
5) 열린 의식을 통해 내 자신을 객체화하고 관조할 수 있는 여유 뿐만 아니라 사물들을 보다 큰 그림에서 통합적으로 바라 보는 안목이 자라났다.
6) 훨씬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런 비일상적 의식이 지속되다 보면 몰입이 쉽게 일어난다는 것과
7) 몰입이야말로 인생을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을 (그 때는 체험만이 있었지만) 먼 훗날에 알게 되었다.
그 여유 있고 적정(寂靜)한 가운데 일어나는 내 안의 엑스터시(Ecstasy)는 생을 살아가면서 경험했던 수많은 정신적, 육체적 쾌감과 만족감과 비교해 봤을 때, 그 어떤 것과 비교가 안 되는 최상의 경험이었다. 나중에 인간 의식에 대한 획기적인 고찰을 한, 20세기 당대 최고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와 긍정심리학의 창시자인 아브람 머슬로(Abraham Maslow)가 그들의 책(아래, 댓글 링크)에서 인간의 최절정 경험(Human Peak Experience)에 대해 규정하고 서술을 한 것을 접했을 때 단박에 그 개념을 이해한 것도 이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게 가능했다. (필자의 이전글, '몰입 과학' 링크)
매년 무종교들인이 급증하는 탈종교화 시대에 살아가는 현 인류가 조만간 ‘종교 후의 종교’로서 혹은 ‘종교 아닌 종교’로서, 새로온 개인 종교의 출현을 예고하는 서울대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강연 링크)의 강연을 최근에 접했다. 성 교수의 예측에 따르면, 제도화된 전통 조직종교들이 급속히 쇠퇴함에 따라 새로운 개인 종교 시대가 열리는데, 그 요체는 ‘내안의 엑스터시’를 통해 나의 인식과 정체성을 확장시키는 새로운 인류가 도래한다는 것이다(링크). 어쩌면, 그런 시대의 도래를 미리 예측하듯 20대에 이미 조금이나마 비슷한 체험을 한 것 같아 뜻 깊다.
이제 인생 후반을 향해 걸어가는 시점에서 그 당시 20대의 체험이 소중한 자산이 되어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의 생활을 할 때조차도 그 일상에 함몰되지 않고 큰 자아내지는 큰 정체성을 위해 나아가도록 지탱하는 힘을 주고 있다.
삶의 매듭을 짓는 시간이 나를 향해 가녀린 손짓을 하기 시작하는 이 때, 그 황금기의 시기를 온전히 다시 회복하여 제 2의 황금기가 펼쳐지기를 소망해 본다. 마치 첫사랑을 다시 상봉하는 설레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