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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칼 38> 내 안의 야만성을 찾아서

by 창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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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칼 38> 내 안의 야만성을 찾아서
(부제: 일상 속 야만 타파를 위한 코드)

 
최근에 “야만의 시대(링크)"라는 책을 접하게 됐다. 교회 조직의 힘을 빌려 인권 유린과 착취가 성행하던 중세의 참혹한 실상을 담은 한 프랑스 농노의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에서 농노 마르셀은 자선과 박애를 내세우는 성직자들이 가난한 농민에게 가혹할 정도로 많은 세금을 징수하거나 불행한 여성들을 마녀 사냥을 통해 동물적 쾌락에 탐닉하는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작태들을 폭로한다. 이를 통해, 종교를 내세워 표방했던 성스러움의 허상과 함께 중세의 여러 극단적인 야만적 시대상을 고발한다. 그 내용을 보자면 인류사에 이런 비극적 암흑기가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이다. 시스템과 관습이 그런 야만을 허용했던 시절이기에 일상에서 벌여지는 평범한 개인들의 야만적 만행들은 또 얼마나 심했을까.
 
그런데 이런 야만의 시대가 오래 전에 막을 내렸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위 같은 내용은 이제는 우리와 무관한 먼 옛날의 얘기에 불과한 걸까?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중세 이후에도 야만은 여러 형태로 인류의 역사에서 지속되어 왔고, 그 본질은 인류의 DNA에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야만에는 불합리한 사회제도, 지배자들의 폭력, 착취, 인권 유린, 권력 남용 외에도 평범한 일상에서 개인들이 보이는 폭력성, 극도의 이기심, 오만한 무례함, 무지막지한 뻔뻔함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런 야만의 시간들은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진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순화되었지만, 과학과 기술이 진보하고 거대 문명을 이룬 현대에서도 여전히 도처에서 반복되고 있다.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삶의 기반이 되는 정치 무대는 공익을 위한 경쟁과 협력 대신에 각 진영의 혼란한 이권 싸움장이 되고 있다. 비상식이 활개치는 일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일부 사상가들이 미리 예견한 대로, 문명이 발전할수록 미개한 정신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미개한 정신의 확산은 사회 시스템이나 의료 산업 같은 거대 조직이 만들어 내는 부당한 착취와 만행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불합리하고 천박한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일상적인 야만적 행위에서도 드러난다.
 
일례로 고국에 갈 때마다 삶의 환경들이 더욱 삭막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는 경쟁을 최고 가치로 떠 받드는 신자유주의와 경쟁 교육의 영향인듯 하다. 학교는 어릴 때부터 경쟁과 능력주의에 입각해서 아이들을 성적과 입시 경쟁에 내몰다 보니 도덕성이 부재한 이기적인 아이들만 양산하고 있다. 사회에서는 남을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풍조가 만연되면서 예전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연대 의식들도 다 사라졌다. 사회 전체가 상식보다는 이득을 최우선 가치로 두다 보니 사람들이 배타적이고 야만적인 삶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를 비판하고 정화해야 할 대부분의 언론들도 공정성과 사회적 정의는 안중에도 없고 이권 중심으로 움직이는 이익집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물질에 대한 강박적 추구를 부추기는 천민 자본주의도 개인들의 야만을 부추기는 데 큰 한 몫을 하고 있다. 물질적 성공이 삶의 최우선 목표가 되면서 인간 관계는 경제적 이득의 도구로 전락하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을 자연스런 현상이 될 정도로 사람들은 야만스러움에 무감각해져 가고 있다. 이 가운데 소위 ‘갑질'로 표현되는 조금 가진 자들의 횡포와 만행은 굳이 언급해서 무엇하랴. 
 
더욱 가슴 아픈 것은 국가 지도자의 무지막지함은 정치적 혼란을 부추기고, 이는 서민들의 삶의 피폐로 이어지면서 본격적인 야만의 시대를 도래시켰다. 지도자의 무능력과 무지는 사회 전체의 방향성을 잃게 만들어, 상식이 실종하고 비상식과 불합리가 만연하는 사회를 만들어 버렸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과도한 차별, 일상에서의 언어 폭력, 사람에 대한 무례함과 뻔뻔함 등이 너무나 흔한 일들이 되어 버렸다. 
 
이런 살벌한 환경 속에서 넘치는 자극과 정보의 홍수는 이성적 사고의 온전한 작동을 방해하여 야만의 토양을 더욱 살 찌우는 것 같다. 과잉 자극과 편향된 정보의 홍수는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비이성적 판단과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들을 부추기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야만은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것의 발현자는 멀리 갈 필요없이 이웃집 사람일 수 있고 직장 동료일 수 있고 내 친구일 수도 있다. 아니, 바로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럼, 여전히 야만이 넘치는 이 시대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처방법은 없는 걸까? 물론, 제일 영향이 큰 사회 시스템의 변화가 중요하지만, 이는 거대한 숙제이므로 일단 차치해 두고 개인에 초점을 맞춰보는 게 단서의 핵심이 아닐까. 개인을 위한 기본적인 처방법의 3대 키워드는 지성과 양심, 그리고 성찰이라고 생각해보고 싶다. 
 
지성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건 누구나 아는 바다. 아는 만큼만 보이고 아는 만큼만 이해하고 말할 수 있기에 지성의 정도에 따라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이 달라진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범위로 세상을 보고 그 범위 내에서 해석을 하다 보니 많은 이해 출돌과 고통이 따르고 있다. 2천년여 전에 무지는 모든 오해와 갈등과 고통의 근원이라고 어느 성인이 일갈했었다. 깊은 사고를 통해 안목을 넓히고 문제를 보다 크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지성의 연마야 말로 이권이 난무하는 이 어지러운 세상을 향해함에 있어 큰 나침반이 된다고 할 것이다. 
 
양심은 누가 혹은 무엇이 우리에게 심어주는 거라기 보다는, 올바른 행동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게 하는 자발적인 도덕적 기준이다. 즉, 그것은 저 바닥에서 올라오는 자기 영혼의 목소리이다. 지성과 성찰이 부족하면 양심의 목소리는 숨어 버리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양심을 기르기 위해서라도 지성과 성찰이 반드시 같이 동반되어야 한다. 무엇이 그르고 안 그런지는 다 갖고 있는 가치와 잣대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경쟁이 기본이 되는 이 시대에서는 남에게 해를 가하지 않으면서 본인의 이득을 챙기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바로 양심이라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찰과 자기 객관화를 위한 메타인지의 양성이다. 자기를 밖에서 보듯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힘이 메타인지인 바, 이는 자기 성찰력과 직결되는 부분이고 이는 동물과 인간을 구별해 주는 가장 중요한 바로미터이다. 불행하게도, 고국의 경쟁 이데올로기 중심의 교육은 메타인지를 기르는데 완전히 실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만과 오만에 가득찬 행동을 부추기고 야만을 일상화시키고 있다. 일상의 환경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끊임없이 쫓겨 사는 삶, 매달리는 삶, 관계나  일에 늘 치이는 부산한 삶 등은 마음의 여유를 고갈시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완전히 박탈한다. 그러니, 자주 자기만의 가처분의 시간을 확보해서 마음의 여유를 만들고 이를 통해 자기 성찰의 힘을 키워야한다. 그 성찰의 힘이 커져서 메타인지도 같이 자란다. 
 
오늘도 내 안에 흐르는 야만성이 기지개를 펼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이 야만이라는 충동은 내 성찰과 양심의 눈이 한 시라도 방심하는 순간 다시 뛰쳐 나올 것이다. 하여, 부대를 지키는 보초병의 심정으로 오늘도 나는 지성을 연마하고 양심을 작동시키고, 매 순간 메타인지의 날카로운 날을 갈아 성찰의 깊이를 더 해 본다.
 

 

야만_그림.jpg

(사진 출처: 구글 사진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