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모두 산이 좋아서 모인 분들이라 다른 이야기보다 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함 풀어 보겠습니다 물론 퍼 왔고요 제가 한국에 있을때 제일 좋아한 산 설악 입니다 지금은 자주 못가지만 항상 그리운 설악 입니다
설악산은 천태만상의 얼굴을 하고 수많은 등산객들을 맞이하는 천혜의 도장이다. 장대한 능선과 깊은 계곡, 사시사철 변화무쌍함을 보여주는 기암절벽은 많은 등산객들을 유혹한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설악산을 동경하며 몇 번쯤 다녀왔을 것이다. 전문등반을 추구하는 산악인에게도 설악산은 남다른 기억으로 다가온다. 수많은 바위절벽과 암능들은 클라이밍과 리지 등반의 최적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설악산은 그 뛰어난 산세와 수려함에도 불구하고 6.25 이전에는 금강산에 가려서 일반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산이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설악산 탐승 기록들이 존재하나 그 기록도 그리 많지 않고 또 금강산 가는 길에 잠시 들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1933년 발표된 노산 이은상의 <설악행각>은 그동안 금강산에 가리어 빛을 보지 못했던 설악산을 산악계에 소개하는 계기가 된다. 본격적인 의미에서 설악산 등반이 이루어진 것은 1939년으로, 백령회 설악산 등반대에 의해서 동계초등이 이루어지며 일반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설악산 등반이 늦게 시작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북쪽 산들의 영향이 컷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은 잘 알려지고 교통이 편했던 것에 비해 설악산은 교통의 오지로 접근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1960대까지 등반로도 거의 없었고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다. 워낙 교통편도 좋지 않아 어디서 접근하든 설악산 대청봉까지 오르고 내려 오려면 최소한 일주일 이상 걸렸다. 서울 마장동에서 새벽에 버스를 타면 비포장도로를 달려 저녁이 되서야 속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속초에서 하루밤 자고 설악동까지 가려면 다시 한나절이 걸렸다. 따라서 설악산 원정등반은 짧게 잡아도 10일 정도, 길게는 보름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설악산은 산악인의 접근 이전에도 지역주민이나 승려들 약초꾼, 사냥꾼들에게 삶에 터전이었다. 따라서 1700미터 조금 넘는 산을 전인미답봉의 초등정 개념에서 바라보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의미를 없어 보인다. 다만 암벽등반이나 리지등반의 경우 근대적 장비와 등반기술이 없다면 등반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암릉의 리지 초등반 기록을 찾아보는 것이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울산암
울산암는 외설악 학사평과 내원골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해발 873m, 총길이 2.8km에 달하며 30여개의 암봉으로 이루어진 국내최대의 암벽이다.암장의 폭이 600m, 등반 최대높이는 200m 에 달한다. 울산암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설악산 울산암의 이름 유래로 가장 많이 알려진 얘기는 1983년 뿌리 깊은 나무 출판사가 발행한 ‘한국의 발견’ 강원도 속초시 편에서 ‘울산바위’ 전설,과 함께 ‘속초 지명의 유래’가 적혀 있다.
옛날 조물주가 금강산의 경관을 빼어나게 빚으려고 전국의 잘 생긴 바위는 모두 금강산으로 모이도록 불렀는데, 경상도 울산에 있었던 큰 바위도 그 말을 듣고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으나 덩치가 크고 몸이 무거워 설악산에 이르렀을 때 이미 금강산은 모두 다 만들어진 후라서 금강산에 가보지도 못하고 울산바위는 현재의 위치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설악산 유람길에 나셨던 울산 고을의 원님이 울산암에 얽힌 전설을 듣고 신흥사 스님에게 울산 바위는 울산 고을의 소유인데 신흥사가 차지했으니 그 대가로 세를 내라고 하여 해마다 세를 받아 갔는데 어느 해인가 신흥사의 동자승이 이제부터는 세를 줄 수 없으니 울산바위를 울산으로 도로 가져 가라고 한 다. 이에 울산 고을 원님이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은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에 많이 자라고 있는 풀(草)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매 새끼를 불로 태워 재로 꼰 새끼로 바위를 묶었지만 울산 고을의 원님은 이 바위를 가져갈 수 없었다 이에 더 이상 울산바위에 대한 세를 내라는 말도 못하게 되어 그 후로는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가 한자로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자를 써서 속초(束草)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오늘날 속초의 지명 유래라고 설이다.
즉 속초의 유래가 울산암이라는 말이 생긴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이것도 설악산이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를 생각해 보면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한편으로는 계조암에서 보면 울산바위가 마치 울(울타리 즉 담)같아 보이는데,. 그래서 '울같은 산바위'란 뜻으로 '울산바위'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는데, 이 얘기가 좀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
1955년 10월 서울대 문리과대학 산악회는 류흥열단장 외 13명으로 구성되어 경비군인을 대동하고 신흥사로 들어온다. 이들 중 김국민,정철용, 정원은 1955년 7월 홍종인 외 20명으로 구성된 한국산악회가 장비부족으로 시도하다 만 울산암 1,2,3 봉을 처음으로 등정한다. 이후 비선대를 하산하여 천불동으로 들어온 후. 염주골 화채능을 거쳐 대청봉에 오른다. 이때 천불동계곡 귀면암 위쪽의 다섯겹 폭포를 보고 유홍렬 단장이 오련폭이라고 명명한다. 이 등반은 해방 이후 설악산에서 행해진 개척등반의 효시로 이후 우리나라 창조적인 개척등반활동을 불러 일으키는 커다란 자극제 역할을 한다. 또한 이듬해인 1956년 하계에 4,5,6봉을 등정한다. 따라서 울산암 초등은 서울대 문리과대학 산악부로 보야야 할 것이다. 한편 1956년 8월 전담 등의 슈타인맨 클럽이 서울대문리대 산악부의 얘기를 듣고 새로운 코스를 개척하고자 외설악에 들어온다. 이들은 울산암 1,2,3 봉을 완등하고 천불동계속, 죽음의 계곡을 거쳐 대청봉에 오른다. 1957년 7월 박승준외 라테르네 크럽 등반대는 전년도 개척된 죽음의계곡을 거쳐 대청에 오른후 하산하여 울산암 전 암능을 종주한 후 달마봉도 등반한다. 그리고 이후 1969년 에코클럽이 '에코길'을 1970년에는 직등코스인 '번개길'을 개척한다. 그해 은벽 산악회에 의해 울산암 전 암릉이 리지등반된다. 1974년 계우회에 의해 동계초등이 이루어진다 이후 여러 산악회 들이 울산암을 샅샅히 누비며 다양한 길을 개척한다.
설악산에서 울산암의 암벽과 암릉이 가장 먼저 개척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울산암이 외설악 어디에서도 잘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암벽과 리지등반에 관심이 있는 산악인에게 외설악 어디서나 보이는 울산암은 매력적인 등반지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시대 창건된 신흥사의 부속암자인 계조암이 울산바위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따라서 등반하기 위해 울산암에 접근하기도 매우 쉬웠다. 이러한 이유로 울산암리지가 설악산에서 가장 먼저 개척된 것으로 사료된다.
천화대
천화대는 설악산을 대표하는 암릉으로 대표적인 리지등반 코스이다. 천불동 계곡을 따라 비선대를 지나 오른쪽 설악골과 잦은바위골 사이의 능선으로 말한다. 천화대 능선은 왕관봉 범봉을 거쳐 공룡능선 1275봉으로 이어진다. 천화대에서 범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오른쪽의 암릉인 흑범길 염라길 석주길을 함께 천화대리지로 부른다. 잦은 바위골을 사이에 둔 건너편 칠형제봉도 설악산의 대표적인 리지등반코스이다.
천화대라는 명칭의 1969년 한국산악회의 해외원정훈련의 10동지 조난사고 후, 당시 설악산악회 회장이던 이기섭씨와 설악산 개발위원회가 바위 첨봉들이 '하늘나라의 꽃처럼 피어오른 곳이다' 란 뜻으로 천화대라고 명명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천화대(天花臺)라는 명칭은 금강산에서 차용해 온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 구룡연 코스에는 옛부터 하늘의 꽃밭이라는 '천화대'가 있었다. 이를 차용해 설악산 암릉에 천화대라고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천화대라는 이름보다 범봉, 석주길 등의 이름들이 더 일찍 명명 되었다는 것이다.
1967년 봄 요델산악회의 백인섭,유충길,장승복 3인은 잦은바위골을 통해 범봉에 올라 거대한 호랑이가 동해를 주시하는 형상이라는 뜻으로 범봉이라고 명명한다. 또 백인섭, 송준호,오세진은 1968년 5월 설악골로 진입 천화대로 이어지는 암릉을 개척하고 석주길이라고 명명한다. 석주길은 비룡폭포 위에서 불어난 급류에 휩쓸려 유명을 달리한 요델산악회 엄홍석 신현주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두 사람이 연인사이라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백인섭씨의 증언에 의하면 아닌 것으로 확인된다.
천화대리지는 1973년 8월 한양대 산악부 유승우,유혜영,김종오,강윤선에 의해서 설악골입구의 옥류담에서 1275봉에 이르는 전체구간 초등이 이루어진다. 자료에 따라서는 이들이 성균관대 산악부로 소개되기도 하였으나 '한양대산악부 50년사' 기록에 초등기록이 정확하게 나온다. 한양대산악부는 1971,72년 에도 도전하였으나 낙석사고로 실패하고 세번째 도전만에 성공한 것이다. 총 원정 기간은 5박6일이었으며 당일 아침 일찍 옥류담을 출발하여 하루만에 1275봉에 도착한다. 당시의 등반여건으로는 상당히 빠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천화대 초등은 한양대 산악부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천화대 리지 개척에 가장 공이 큰 사람은 백인섭을 중심으로 한 요델산악회라고 할 수 있다. 천화대 암릉은 울산암이나 용아장성처럼 설악산 여러 곳에서 잘 관찰되는 곳이 아니다. 잘 보이지도 않는 암릉이고 더구나 접근로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미지의 능선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암릉이 발견되고 등반이 시도 되었을까?
1966년 요델산악회 백인섭은 무거운 원정짐을 메고 힘겹게 소청봉에서 천불동으로 내려서는 가파른 내리막 길에 있었다. 짙고 무거운 구름이 외설악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순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곤 다시 운해속으로 사라지는 외설악의 암봉들이 시야속에 들어왔다. 모든 것들이 구름 속에 파묻히고 높은 암봉들만 구름을 뚫고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 유별난 암봉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가던 길을 멈춘 백인섭은 남달리 수려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는 독립 암봉이 운해 위로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홀로 외설악 쪽에 우뚝 솟아 수많은 바위봉들을 거느리면서 그 위에 왕중왕처럼 군림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짐을 지고 하산하자 그 암봉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설악동에 도착할 때 까지 그 암봉을 찾을 수는 없었다. 외설악을 관통하는 길이라고는 천불동 계곡길밖에 없었고, 거기에 들어서면 양쪽이 깍아지른 절벽으로 시야가 꽉막혀버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백인섭이 보았던 것은 범봉이었다. 그 때부터 백인섭은 그 암봉을 찾기 시작한다. 지도를 구해 대략적 위치를 확인하곤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대략적인 접근 계곡을 알아낸 후 탐문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계곡은 원주민인 약초꾼과 사냥꾼들 조차 못들어가는 설악산에서 가장 험한 계곡이었다.
키슬링을 멘 1980년대 등반대.
1967년 2월 백인섭은 강길건, 하양도, 김진성과 잦은 바위골 원정대를 꾸린다. 동계적설기 등반, 그것도 전혀 가본 적이 없는 미지의 골짜기원정이었다. 동계장비로 방한의류, 군화 그리고 그 위에 덧신으로 신는 고무장화, 닭털침낭과 내피 및 외피, 에어매트레스, 휘발류버너,취사도구에 남대문에서 구입한 8발아이젠과 피켈에 미제 군용 설피. 거기다가 식량과 자일 등의 등산장비를 준비하니 각자 키슬링의 무게는 60kg넘어 혼자서는 일어설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무게를 줄여야 했다. 등반장비를 줄일 수는 없으니 야영장비 취사장비가 대상이 되었다. 천막을 사용하지 않고 비박만하기로 한다. 그리고 연료와 버너, 각종 취사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모닥불과 군용반합만 사용하고 식량도 밥대신 떡국만 먹기로 하니 짐무게를 10kg이상씩 줄일 수 있었다.
그렇게 등반에 나섰지만 잦은바위골은 초입부터 빙폭을 만들어서 진입을 가로 막는다. 결국 2월의 잦은바위골 등반은 실패로 끝나고 봄에 재도전을 기약한다. 1967년 5월에 백인섭, 유충길, 장승복은 잦은 바위골로 들어서 50m폭포와 100m 폭포를 차례로 올라 범봉 아래에 서게 된다. 50m폭포, 100m 폭포라는 이름도 폭포 길이를 측정한 이들에 의해 명명된 것이다. 범봉 아래서 하루 비박을 한 일행은 다음날 다섯시간의 등반 끝에 범봉 정상에 서게 된다. 범봉에 올라선 등반대는 외설악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 바로 옆으로 공룡릉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보이고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청봉의 덩치가 하늘을 가렸다. 마등령너머 울산바위의 은빛장벽이 빛나고 그 멀리 동해바다가 펼쳐졌다. 시선을 당겨 범봉아래를 보자 여러개의 암릉들이 형형색색 다른 모습으로 뻗어내리고 잇었다. 이전에는 본적이 없는 날카로운 능선이 칼날 릿지를 이루며 하늘길을 만들고 있었다. 천화대 전체를 바라보며 천상의 신선이 된 기분을 느낀다. 이후 백인섭은 요델산악회 회원들과 석주길 암릉, 칠형제봉 암릉, 범봉연봉, 동원암 암릉을 개척한다.
천화대리지는 등반난이도가 그리 높은 암릉은 아니다. 문제는 접근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접근로인 천불동 계곡을 들어서봐야 양쪽으로 깍아지른 바위만 보일 뿐 암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비록 천화대 초등의 역사는 한양대 산악부로 기록되어 되었지만 백인섭과 요델산악회는 그 보이지 않는 암릉을 찾아내고 접근로를 개척하여 천화대리지의 틀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개척된 천화대는 1974년 어센트 산악회에 의해 동계초등된다. 그리고 이듬해 공룡능선 상의 1275봉을 동계초등한다. 이들의 초등은 1275봉을 오르 내리며 거벽 등반과 같은 형태로 시도되어 많은 산악인들에게 빙벽, 암벽, 암릉등반의 붐을 일으키는 게기가 된다.
용아장성
봉정암 사리탑을 기점으로 동으로는 가야동계곡과 만경대,공룡능선을 거느리고 서로는 수렴동 계곡과 구곡담 계곡을 끼고 서북주릉이 장대하고 웅장하게 펼쳐져 있어 신비로운 경관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용아장성이 있다. 내설악에 자리잡은 용아장성은 용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암봉들이 연이어 성처럼 둘러쳐 있으며 , 20여개의 크고 작은 암봉들이 용의 송곳니처럼 솟아 있다.
용아장성은 내설악 어디에서도 조망되며 그이름은 공룡능선과 마찬가지로 그 생김새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추측된다. 용아장성은 1970년에 초등되는데 내설악 어디서도 조망되는 암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초등시기가 늦은감이 있다. 용아장성은 1970년 10월 요델산악회의 송준호외 3명에 의해 초등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료를 좀더 찾아보면 요델산악회 외에도 한국클라이밍클럽(KCC), 어센트 산악회도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클라이밍클럽 정우섭씨에 따르면 당시 용아장성 등반 한 것은 초등을 목적에 두었다기 보다는 알프스 거벽등반을 위한 훈련지로 용아장성이 적격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4개조로 나누어 각각 수렴동과 봉정암에서 출발하여 방사상 등반방식(여러개 등반조가 각각 다른지점에서 출발하여 한지점에서 만났다가 각각 다른 지점으로 하산하는 방식)으로 용아장성을 등반하는 것이었다. 등반대는 새벽3시에 기상하여 오후 3시에 등반을 마치고 전체 식량을 행동식으로 먹으며 침낭없이 비박하는 등 고산거벽등반을 위한 실험적 성격이 컸다.
동계초등은 1972년 2월 한양대 산악부와 요델산악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좀더 자세히 살표보자. 한양대 산악부는 1월26일부터 2월9일까지 유재활을 대장으로 하는 14박15일의 동계설악산등반에 들어간다. 연초부터 눈이 많이 내려 시민회관 앞을 출발한 버스는 18시간이 지나서야 설악동에 도착한다. 눈이 많이 온 설악산 양폭산장에서 며칠 간 구인모로부터 최근에 도입된 프랑스식 빙벽등반기법을 배운 후 봉정암에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동계 용아장성 초등을 시도하였다. 문태갑, 장세영, 이수철이 공격조로 나서고 유재활,김시한, 이용래가 지원조로 편성되어 공격등반루트 개설 및 로프를 설치하여 2월4일 초등에 성공하였다. 요델산악회는 1972년 1월31일부터 2월 10일까지 유충길을 대장으로 10박11일의 설악산 등반에 들어간다. 등반의 목적은 봉정연봉(용아장성)의 동계 초등이었다. 결국 눈이 펑펑 쏟아지는 2월 8일 등반에 성공한다. 한양대사악부와 요델산악회는 거의 같은 시기에 용아장성 동계등반이 이루어낸다. 한양대산악부는 2월4일 요델산악회는 2월8일. 구태여 초등이라고 한팀만 꼽으라고 한다면 용아장성 동계초등은 한양대 산악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룡능선
1957년 박승중 외 몇명의 라테르네 클럽은 전년도 개척된 죽음의 계곡코스를 통해 대청봉을 오른 뒤 수렴동, 오세암, 마등령을 거쳐 신흥사로 하산한다.. 이들은 마등령에서 대청으로 뻗은 암늘을 처음으로 공룡능이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대청에서 마등령에 잇는 능선은 공룡의 등뼈 같다고 해 공룡능선이라고 명명 했다는 것이다.
대청에서 마등령에 이르는 공룡암릉의 초등기록은 확실치 않다. 다만 김근원, 유창서의 기억에 의하면 변철환 김진수외 1명에 의해 1961 - 63년 사이에 등반된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한다. 기록상으로는 1963년 겨울 한양대 산악부 선우중옥,정규현,최태웅에 의해 최초로 종주등반 된다. 다만 한양대 산악부 설악산 원정기간이 1963년 12월28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인 것으로 보아 실제 공룡능선 등반은 1964년 1월로 추정된다. 그리고 1964년 7월 서울공대 유승규 외 6인이 공룡능선상에서 비박 후 등반을 한다. 동계초등은 1968년 1월에 경북학생산악연맹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한양대 산악부의 초등이 겨울에 이루어진 관계로 잘못된 기록으로 보인다.
1950년대 벌어진 울산암 등반은 암벽등반 개념이기 때문에 리지등반의 시작은 공룡능선 종주등반이라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즉 공룡릉에서 시작된 리지등반은 1970년 요델산악회에 의해 용아장성이 초등되고 1972년 2월 요델산악회와 한양대 산악부에 의해 동계 초등. 그리고 설악의 마지막 암릉인 천화대가 1973년 한양대 산악부에 의해 초등되고 1974년 1월 어센트의 전두성 외 4명에 의해 동계 천화대 연봉 등정으로 마무리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견해에는 울산암 등반을 어떻게 볼것인가 하는 문제 이외에도 논란이 되는 부분이 한가지 더 있다. 그것은 공룡능선등반을 리지등반으로 볼 수 있는냐는 문제이다. 즉 능선의 상당부분을 구비구비 돌면서 가기 때문에 리지 등반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견해이다. 실제로 공룡 능선을 가보면 이 견해가 더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이상과 같이 설악산 등반사는 우리나라 근대 등산의 태동과 맥을 같이한다. 또 설악산은 우리나라 리지 등반의 발상지이자 요람으로 한국 산악운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즉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요람지로 알려진 서울근교의 암장이 갖지 못한 종합적인 요소를 갖추고 한국산악운동의 제 발전 과정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산악운동의 토착화에 큰 기여를 했다. 설악산은 이를 통해 고산등반이나 거벽등반의 원정의 훈련장으로 한국 산악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위 기록들은 각 산악회 회보 및 산악잡지 등을 참조하였다. 앞으로도 직접 등반에 참여 하셨던 분들의 증언이나 기록과 자료발굴로 보다 완벽한 설악산 리지등반사가 정리되길 기대해 본다.
언젠가 기회가 되길 바래봅니다.
용아는 두번 정도 했었는데 제겐 뜀바위가 제일 무서웠어요. 목숨걸고 뛰었었는데 이젠 못할듯합니다.
지금 설악이 아주 멋질때일듯요. 산정상부에서 부터 단풍이 물들어 가고 있을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