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설렘으로 읽었다. 그 소설을 읽을 때 인상적인 것은 연민으로 사람을 대하는 작가의 섬세한 태도와 그것을 담아내려는 문학적 표현방식이다. 작가의 태도는 화자로 등장하는 경하라는 인물을 통해서 드러나는데, 소설을 읽는 내내 한강 작가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소설의 전체적인 구조는 경하가 친구 인선의 삶을 들여다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다. 그런데 경하를 통해 작가가 인선의 삶을 들여다보는 표현방식은 두가지 방식에서 도드라졌다. 문체 스타일과 이야기 설계 방식에서 그렇다.
먼저, 경하의 시각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닌, 제한된 시점이다. 다큐멘터리 르포의 리포터의 시각이다. 어떤 사실을 규명해보려는 시각이다. 소설에서 지배적인 문체가 의문형 질문인 이유이다. 여기 몇가지 예들이 있다:
“묘지가 여기 있었나”
“왜 이런 데다 무덤을 쓴 거야?”
“날마다 이렇게 밀물이 들었다 나가고 있었던 건가?”
“충격 때문에 인선의 어떤 부분이 달라진 걸까?”
“얼마나 오래 이렇게 서서 기다리고 있는 걸까?”
“더 큰 눈이 내리는 걸까”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는 걸까”
“지금 그를 죽여야 하는 건가”
“이런 느낌을 자유라고 부르는 건가”
“어떤 위험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건가”
“인적 없는 곳에 사람을 내려줘도 되는 건가?”
“살갗이 얼어붙은 건가”
인상적인 질문 스타일은 “...걸까”와 “...건가”로 끝나는 문장의 끝맺음 형식이었다. 이런 질문들은 독자를 현장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화자인 경하뿐만 아니라 작가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효과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보듯이 호기심을 가지고 화자를 따라가게 된다. 소설을 읽는 내내 빠져들었던 것은 저런 호기심 있는 질문들이었다. 여운을 남기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화자의 시각이 너무 섬세해서 어떤 때는 그 마음 속을 따라가는데 헉헉댔다. 은유적 혹은 직유적 표현들이 많아서, 소설을 읽다가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중간 중간에 책을 덮고 잠시 쉬어야 할 때가 많았다. 소설 첫 부분에 등장하는, 우듬지가 잘린 검은 나무들은 4.3 사태 때 죽은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후에 등장하는 많은 은유적 대상물들이 무슨 의미인지 곰곰히 생각해봐야 했다.
예를 들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검은 나무를 덮고 있는 휘몰아치는 하얀 눈은 무엇을 상징할까? 4.3 사태 때 죽은 사람들을 상징하는 검은 나무들을 숨겨 덮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감싸려는 따뜻한 이불 같은 것일까?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이 주인공 마음 속에 몰아치는 처절한 열정인 것처럼, 죽은 이들의 사연들을 캐보려는 화자인 경하의 처절한 몸짓인가?
경하가 인선의 요청을 받고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눈발 날리는 정거장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80세 할머니를 만난다. 이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이 소설에서 넘쳐나는,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두상이 작고 주름진 얼굴에” “다정하지도 무심하지도 냉정하지도 않은” 인선의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할머니다:
“지팡이를 짚은 맨손이 시리지 않을까.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는 것 같다.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은 이 적막한 읍에서, 살아서 숨을 쉬는 것은 이 정거장에 서 있는 두 사람뿐인 것 같다. 문득 손을 뻗어 노인의 흰 눈썹에 맺힌 눈송이를 닦아주고 싶은 충동을 나는 억누른다. 내 손이 닿는 순간 그의 얼굴과 몸이 눈 속에 흩어져 사라져버릴 것 같은 이상한 두려움을 느낀다” (1부 4장 새)
이 할머니는 4.3 사태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겪은 사람일 수 있다. 이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작가의 이런 따뜻한 시선이다. 그런데 왜 경하는, “내 손이 닿은 순간 그의 얼굴과 몸이 눈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 같은 이상한 두려움”을 느낄까? 할머니의 속마음을 모르니까 거침 없는 위로가 혹시 그 할머니에게 상처를 줄까봐 걱정되어서, 그 마음 속 상태에 따라 어떤 위로를 해야한다는, 세심한 마음의 표현이지 않을까?
경하가 정거장에서 80세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인선과 어머니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소설은 전개된다. 이런 의식의 흐름 수법이 이 소설을 관통하는 구조다. 그러니 관련성을 바로바로 잡아내지 못하면, 섬세한 표현을 제대로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소설을 읽다가 잠시 쉬면서, 그런 시적 표현과 중첩된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시를 읽는 듯한 즐거움이었다.
이렇게 경하의 어떤 경험들 사이에 인선의 이야기를 삽입하는 방식이 이 소설의 이야기 설계 방식이다. 3대에 걸쳐 겪어온 고통들이 화자인 경하의 시점에서 만난다. 이런 방식으로 인선의 증조부모, 삼촌, 어머니 그리고 인선의 삶이 조명된다. 위에서 말했듯이, 정거장에서 만난 80세 할머니를 바라보는 경하의 따뜻한 시선으로 말이다.
이 소설은 경하의 시선을 통해, 4.3 사태를 조사하는 르포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작가의 의도는 그 4.3 사태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있지 않는 듯 하다. 작가의 의도는 4.3 사태가 3대에 걸쳐서 내려오면서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또한 미치고 있는가에 있는 듯하다. 소설에 표현되는 많은 은유적, 직유적 표현들은 그런 아픈 마음을 담아내려는 노력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수상 선정 이유를 이제야 알 듯하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 이 소설은 4.3 사태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현재 진행형의 역사로 끌어내면서, 아직도 어딘가에서 고통을 견디면서, 혹은 고통에 무너진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헌사다. 작가는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경하라는 화자의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소설에 넘쳐나는, 은유적 혹은 직유적 표현을 통해, 작가는 애정어린 따뜻한 시선으로 쓰라린 고통을 섬세한 시적 감성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느낌이다.
소설 마지막 “3부 불꽃”의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어떤 소망를 표현하는 듯 하다. 이겨낼 수 있다고. 인선과 경하는 숯속에 몰아치는 바람과 눈송이를 뚫고 달려간다. 그 너머 어둠 속에 보살펴지지 않은 어떤 죽음이 있는 곳으로. 가지고 간 촛불이 꺼지자 가지고 간 성냥개비를 그어 다시 불을 밝힌다.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가장 작은 새가 하늘을 날았다. 작가 한강이 그랬다. 그렇게 역사를 되살려냈다. 아련하고 따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