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US-I & II
흔한 내 사무실 풍경이다.
Whiteboard를 종횡부진 누비며 머리 속에 생각을 끄적이다 보면 실마리가 잡힐 때가 있다.
이 날은 새로 구한 marker도 시험해 볼 겸 총 천연색으로 휘갈기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때와 달리 실마리는 잡히지 않고 점점 엉키고 있었다.
잠깐 쉬는 중에 구글 포토에서 예전 추억 사진이라고 추천을 해 준다.
사진은 아니고 예전에 큰 놈이 태어난 지 100일 정도 되었을 때 자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한참 울다가 곤하게 자는 모습에 간만에 연필을 들어 그렸었다.
갓난아기는 머리카락도 별로 없다는 것도, 잠을 정말 많이 잔다는 것도, 여러가지를 모르던 초보 아빠 시절이었다.
그 때 무슨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그려서 그랬는지, 다 그리고 나서 제목을 "OPUS"라고 거창하게 붙였다.
세월이 흘러 둘째가 태어났다. 이 놈도 어느 날 문득 그려 보았다.
제목은 OPUS-II로 하고 첫째의 그림은 OPUS-I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둘이 좀 컸을 때는 둘을 같이 그려 본 적이 있다.
그림은 참 묘한 것 같다. 지금도 이 그림을 그렸던 시간 장소 주변 사람 냄새까지 기억나는 것 같다.
간혹 사람들이 내 카톡 프로필 사진이 뭐냐고 묻는데 이 그림들이다.
굳이 내 사진을 올리기는 싫고 그러나 내 정체성은 보이고 싶어 선택한 것이다.
얼마 전에 내 생일 날이었다.
두 놈 다 멀리 있어 오지는 못하고 은근 전화라도 하겠지 기대하고 있었다.
작은 놈이 먼저 전화가 왔다.
역시 어릴 때부터 나와는 다르게 정이 많은 놈이구나 생각하고 기쁘게 받았다.
생일 축하와 내 안부를 묻더니, 평소와 다르게 전화를 끊지 않고 계속 말을 한다.
여자 친구를 새로 사귀었다고 해, 잘 되었구나 하니, 내일 데이트를 가야 한다며 조언을 구한다.
그런 걸 왜 아빠한테 묻는지, 이상하다.
그리고 깨달었다.
데이트 비용이 부족하냐고 물었다.
친구들과 같이 사는 아파트 전기 수도 요금이 많이 나와 별로 통장 잔고가 없다는 기막힌 논리를 전개하기 시작한다.
생일 축하 전화도 받았겠다, 용돈 보내 줄 테니 데이트 잘 하라고 기분 내고 전화를 끊었다.
1000 달러를 보내 주고 나서, 큰 놈은 전화 안 오나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 놈이 요새 회사에서 보너스를 잘 받았다고 하니 혹 선물이라도 보내겠다고 하면 지난 번 준 위스키도 많이 남았으니 괜찮다고 우아하게 사양할까 고민을 좀 해 보았다.
조금 있다 큰 놈에게서 문자가 왔다.
생신 축하합니다. 건강하세요.
그리고 이모티콘.
그게 다였다.
원래 따뜻하거나 친절한 성품은 아니지만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약간 부아가 나기도 하고 그 깐깐한 녀석이 문자라도 보낸 것이 대단하지 않은가 합리화를 하기도 했다.
예전부터 아이들은 어렸을 때 많이 웃어준 것으로 키워준 보답은 다 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좀 서운하기는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두 놈들이 다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어디 가서 삥 뜯길 일은 없을 것 같고 둘째는 어디에서도 빌붙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날 사무실에서 whiteboard를 지우고 얼마 전에 본 프로펠러 비행기를 그렸다.
이제 내가 보살펴 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세상을 잘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생일 날 돈 있는 첫째에게 까임을 당하고 돈 없는 둘째에게 삥을 뜯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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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C님 글은 언제봐도 감칠맛이 납니다. 무통 로췰드하고 몬다비가 두번째 와인을 출시했는줄 알았슴다. 대학 때 자주 다니던 작품81 다방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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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C님 글에는 언제나 위트와 따뜻함이 묻어나와 좋습니다.
아들둘있는 아버지가 이렇게 따뜻한데 딸둘있는 저는 왜이렇게 딱딱한지.. 부러울 따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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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그림이 직접 그리신거였군요. 전 와이씨님 어릴 적 사진을 누가 그려준 건 줄요.
도대체 못 하시는 게 뭐래요? OPUS가 무슨 뜻이 있나요? 갑자기 조만간 개봉한다는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트레일러가 떠오르네요.
딴소린데...
저희는 오래 전에 사무실을 다 오픈오피스로 만들어 버려서 디렉터들도 자기 사무실이 없어요. 대신에 회의룸은 넘쳐 나는데 다른 팀에 있는 어떤 사람이 꼭 자기 자리에서 큰 소리로 온라인 미팅을 해요. 하루에 몇 번이나 30분 이상을.ㅠ.ㅠ 이럴 땐 큐비클이 그리워지기도 해요.
헤드폰이라도 가져가야하는데 자꾸만 잊어서시리...
아들만 둘이라도 저리 살가운 막내가 있어서 딸 있는 집 안 부러울 듯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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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us는 라틴어로 원래 work 특히 노력해서 이룬 일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창공님께서 말씀해 주신대로 예술에서 작품, 특히 클래식 음악가들의 작품을 순서대로 정리하며 작품이라는 뜻으로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FAB님 말처럼 유명한 와인 이름이기도 하지요.
원래 뜻인 hard work을 통해 이룬 일이라는 것이 제 경우에 맞는 것 같습니다.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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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거장들이 위대한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냈다지만, 자식만큼 위대한 작품이 또 있을까요? 베에토벤의 작품 번호 67번, 교향곡 번호 5번인 ‘운명’도 운명처럼 주어진 나의 자식만큼 위대할까요? 하여, 자식 새끼를 오퍼스 원, 오퍼스 투로 이름을 매긴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아무나 쉽게 생각지 못했던 위대한 발상인 것 같아요. 소인이라서 그런지 저는 그런 발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역시 와이씨님은 측면적 사고(lateral thinking)가 풍부하시군요. 이전에도 그런 적이 있지만, 가끔 님의 창의성에 감탄한답니다. 작품 번호 1번과 2번으로 님의 인생은 찬란했다고 여겨지고 앞으로도 빛날 거라고 믿습니다. 덕분에 저의 경우도 작품 번호 1번의 존재도 깨닫게 됐습니다.
사무실 회이트 보드 위에 발상이 종횡무진으로 흐르는 (저는 당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낙서장을 보면서 오늘도 기발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서 탁월한 문제 해결을 이루는 좋은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