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별명은 "밥"이었다.
나는 일부 중산층과 대다수 서민이 사는 서울 변두리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잘 나가지도, 그렇게 막 나가지도 않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다들 새로 고등학교에 입학해 서먹한 1학년 때였다.
유달리 시끄러운 친구 셋이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친했다고 하는데 서로 부르는 별명이 가관이었다.
- "막". 이 친구가 이 그룹에 대표격이었는데 얼굴이 막 생겼다고 해 얻은 별명이었다. 워낙 유명한 별명이라 선생님들도 이름은 모르고 별명으로 이 친구를 부르곤 했다.
- "ㄷ덕". 얼굴이 넓대대한 떡판이라 붙여진 별명이다. 이것이 콤플렉스였는지 항상 머리를 무스로 빳빳하게 세우고 다녔다. 당시 두발자율화라고 하지만, 허용이 안되는 헤어스타일이었다. 그런데도 이 녀석은 선도부 선생님께 자신의 외모 콤플렉스를 끊임없이 하소연하였고, 결국 그 머리를 하고 다니는 것을 허락 받았다.
- "뚱". 이 녀석은 키가 180cm가 넘고, 체중은 비밀이나 100kg을 넘는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어떻게 다른 별명이 가능하겠는가?
- "똥". 별명의 사연은 그들 사이의 비밀이다. 본인은 이 별명을 매우 싫어하였으나 다음 등장하는 친구로 인해 그냥 받아 들이게 되었다.
- "변". "막", "ㄷ덕," "뚱," "똥"은 중학교부터 이미 알던 사이인데 "변"은 다른 학교 출신이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가 같은 부류임을 알아 보고, 곧 어울리게 되었다. 이 녀석은 성이 "변"가이다. 생긴 것은 사실 말끔한데, 하는 짓이 좀 변태스럽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변"이 되었다. 이 친구는 자신의 별명으로 "변"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변"의 당당한 자세는 "똥"에게도 영향을 미쳐, "똥"도 본인의 별명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끔 하였다.
- "밥". 본인이다. 지금도 잘 먹지만 고등학교 때는 정말 많이 먹었다. 배고플 때는 라면 4개와 밥 두 그릇 정도는 말아 먹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고기 사준다고 맘껏 먹으라는 아버지 친구 분 말씀에 갈비 5인분과 냉면 한 사발을 먹어 치워 아버지를 난감하게 만든 적도 있다.
고등학교 때는 점심 저녁 도시락 2개를 싸 들고 다녔다. 도시락이 꽤 컸는데, 어머니가 어디서 구하셨는지 보통 도시락의 4배 크기는 되는 것이었다. 당시 점심 도시락은 2 교시 이후, 저녁 도시락은 점심 시간 때 먹는 것이 선생님들과의 신사 협정이었다. 저녁은 학교 매점에서 사먹었다. 그런데 2교시까지 배고파 기다리지 못하는 친구들이 많아졌고 나를 포함한 많은 친구들이 1교시 이후에 도시락을 까먹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2교시에 들어 온 깐깐한 선생님이 음식 냄새에 도시락 먹은 놈들이 누구인지 손을 들어 보라고 하였다. 꽤 많은 친구들이 손을 들고 나도 손을 같이 들었다. 선생님이 이 반은 반장이라는 놈도 "밥"을 못 참는다고 훈계를 하셨다. 당시 나는 부끄럽지만 반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 때 이후 친구들은 나를 "밥반장"이라고 불렀다. 친하게 놀 때는 줄여서 "밥"으로, 선생님의 끄나풀로 아니꼽게 보일 때는 "밥반장"으로 불렀다. 처음에는 그 별명이 마음에 안 들었으나, "똥"처럼 결국 나도 나의 운명을 받아 들였다.
"막", "ㄷ덕", "뚱", "똥", "변"은 모범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제아는 아니었다. 나는 모범생처럼 보였지만 실제는 약간 노는 물이 들은 놈이었다. 별명 때문인지 성향 때문인지 우리는 잘 어울리며 지내게 되었다.
이외에도 항상 시끄러운 "박" 씨 성을 가진 세 녀석과 약간 양아치 같지만 밉지 않은 "고" 씨 성을 가진 두 녀석이 있었다. 이 놈들이 소소한 사고를 자주 일으켰는데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이렇게 한탄을 하셨다.
"우리 반은 "막", "ㄷ덕", "뚱", "똥", "변"도 시끄러운데 쓰리 "박"에 투 "고"도 만만치 않으니… 반장이라는 놈도 그렇고". 과연 고스톱에 일가견이 있다고 들은 담임 선생님다운 일갈이었다.
30대 중반까지만 해도 고등학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식사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나이와 같이 그 양이 줄어 들어 지금은 그 때보다 1/3정도만 먹는 것 같다. 특히 저탄고지로 살을 빼다 보니 예전 "밥"이라는 별명은 이제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참조: A blessing in disguise in Portland, Oregon https://www.bayalpineclub.net/member_story/870723
신년에 떡국 산행을 한다.
그때 "밥"처럼 먹을 수 있을까?
"막", "ㄷ덕", "뚱", "똥", "변", 그리고 쓰리 "박" 투 "고"와 미군 담요 위에서 고스톱 한 판 치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