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

Annapruna Base Camp

by 두루 posted Dec 29, 2014
?

Shortcut

PrevPrev Article

NextNext Article

ESCClose

Larger Font Smaller Font Up Down Update Log Go comment Print


첫쨋날: Tadapani에서 Lower Sinuwa

11월 24일, 그동안 같이 산행을 이끌고 챙겨주시던 산길동무님과 Tadapani란 곳에서 헤어진다. 두분은 porter와 함께 마지막 구간의 Annapurna Circuit을 마치기 위하여 Pokhara로, 나는 가이드와 어젯밤에 만난 산동무님의 까마득한 후배와 함께 ABC를 향해 8시에 출발했다. 2일 전, Tatopani(1190 미터)에서 Ghorepani(24860미터)까지 수도없이 많은 봉우리를 오르고 또 오르며 걸은길의 80 퍼센트가 계단길이어서 나에겐 참으로 힘들었다. 그래도 계단의 높이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은 무척 다행이었 다. 반면에 길동무님은 얼마나 잘 걷는지 도통 아무런 구간도 힘들어 하지를 않았다. 평소에 한시간씩 집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운동을 한 결과가 여실히 증명이 되었다. 

처음부터 엄청나게 내려오는 길은 여지없이 나타나는 수많은 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힘들었다. 그래도 멀리서 보이는 Machhapuchhre를 즐기면서 짙은 아열대성 나무들로 덮인 길을 따라서 걷기는 좋았다.  걸으면 걸을수록 도무지 좋아지지가 않는 계단을 오르고 내리고를 번복하면서 올라 도착한 곳이 Chomrong(2170 미터)인데 이곳은 솟아오른  언덕위에 위치해서 생선 꼬리란 뜻의 Machhapuchhare의 멋진 모습을 전 구간 중에서 가장 잘 볼수가 있는 지역이다. 그런데 모든 lodge에서 하나같이 써 붙여 놓은 놀라운 사인을 보게 된다. " 이곳에서 한국 음식을 팝니다. 닭 백숙, 김치, 된장찌개..." 게다가 코리언 시즌이라는 용어도 있다고 쿨이란 이름을 가진 가이드가 알려준다. 12월부터 1월까지가 코리언 시즌인데 한국 관광객이 ABC로 몰려와 거의 이길을 점령하다시피한 수준이란다. 게다가 그룹을 지어서 짐을 진 포터와 한국인 가이드를 대동해서 내려오고 있는 어린 동양학생들이 있었다. 한결같이 목에 매달고 있 는 팻말에 한국이름과 야외 연장수업이란 표기가 되어 있었다. 인솔 교사에 의 하면 이들은 대전에 있는 어떤 대안고등학교 1학년 전교생 48명들인데 7박 8일의 네팔 현장 수업을 하는 중이라고 한다. 우 리 조국의 높아진 경제력의 힘을 느끼게 했지만 , 네팔 현지 학생들을 위해 몇개나  있다는 엄 홍길씨 학교의 사인을 보 았을때 느꼈던 어깨가 으슥했을때와는 다른 묘한 느낌이다. 

Machhapuchhre의 멋진 경관을 즐기면서, 오늘 밤을 자 게될 건너편 마을을 쳐다보며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이제는 보무도 당당하게, 가슴속의 복잡함도 잊고 움직였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길이, 저어기 아래에 보이는 흔들 쇠다리까지 가야 되는 길이 휨도 없이 가파르게 내려꽂히는 계 단( 2500개나 된다고 산행길에서 누군가에게로 부터 들었다.) 이 아닌가! 아니 게다가 건너편 마을로 올라가야하는 길에 보이는 셀수도 없이 많은 저 계단들은 또 뭐야? 이럴땐 아무 생각없이 그냥 " ~이 구나. 가야지." 아무런 갈등없이 당연하게 한 걸음을 내 딪는 것 만이 최선의 답임을 이미 이 여행에서 배웠다. 정말 고도가 높고 경 사가 급한 곳을 오를 힘든때는 아아주 짧은 잡념조차도 숨 조절과 발걸음을 흐트리게 했었다. 그리곤 또 다시 힘을 끌 어 모으기 위해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심호흡을 서너번해서 산소를 다리로 내려 보낸 뒤라야 걸을 수가 있었다. 그 래서 조금의 여지도 없이 깊게 숨쉬는 것과 천천히 발걸음 움직이는것에만, 오로지 이 두가지만에만 집중을 해야만 했 었던 구간이 있었다. 그리고 이 경험이 나에겐 이번 여행에서 얻은 귀한 체험인데 앞으로 내삶을 단순화 시키는데 도 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불평없이 계단을 걸어서 내려갔고 다리를 건넜고 계단으로 된 언덕을 올라갔다. 폴대에 몸무게를 의지하고. 그것도 아주 자주. 많이. 

Lower Sinuwa( 2360 미터)의 Sheppa란 lodge에 숙소를 정했 다. 이곳 conservation area에서는 나무들을 보 호하기 위해서 많은 숙소들이 서구의 보조를 받아 태양열 집열판을 이용하여 샤워할 물들을 데운다. 날씨가 흐렸던 이날은 샤워를 할 수 있는 미지근한 물도 없었고, 여분으로 물을 데우 는 개스통이나, 식당에 난로조차도 없었다.  끈적거리고, 춥고, 배도 고프고, 피곤에 지친 몸을 끌고 부엌을 찿았다. 

이곳의 부엌 에서는 흙으로 만든 길쭉한 화덕위에 음식을 만드는 냄비들이 얹히고 , 차를 끓이는 커다란 주전자가 놓여있어서 불쬐 기에 참으로 좋았다. 그리곤 음식을 만드는 안주인이나 음식을 만들때 도와주는 이집 식구중의 누구든지와 수다를 떨기에 안성 마춤인 장소로 현지인을 직접 만나며 알아가는 귀중한 장소였다. 또한 반짝거리며 가지런히 얹혀있는 주방 도구들과 비록 흙 바닥이지만 반 들거리는 부엌 바닥을 보면서 네팔인의 순박하고 깔끔한 모습이 정이 가게 만들었다. 여느때와는 이집 부엌에서는 남 자들만 음식을 만들며 몸을 데울려면 나더러 캠프 파이어하는 곳으로 가랜다. 왠 캠프 파이어? 

손짓 방향으로 따라가 보니 침대 두개만 달랑있는 흙바닥의 집에 어린 여자 아이를 안은 여자와 젊은 처녀가 모닥불 곁에서 누워서 수다들을 떨고 있다. 비켜준 자리에 퍼질고 앉아서 불을 같이 쬐다가 말을 잃은 두 여자에게 멀쭈르미 빵봉지를 건냈다.나에게 방을 안내한 젊은 처녀가 입을 연다. 영어가 유창한 처녀가 티벳에서 왔다 며 자기는 이집일을 도와주고 있다며 말문을 튼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마당 한 곳에 차려졌던 좌판에 서 이 처녀가 자기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밤새 물건을 덮지도 않고 지키는 사람도 없었음을 보았던 나는 더욱더 네팔 이 좋아졌다. 

17개월이라는 여자 애가 엄마품에 안겨서 엄마가 뜯어주는 빵을 여느애들과는 달리 얌전히 받아만 먹고 있었다. 양팔을 못 쓰며 걷지도 못 한다는 이 아기는 틀려진 불편한 손으로 바닥에 놓인 빵봉지를 잡아 올렸다 떨어뜨렸다하며 재롱을 피운다.  잘 한다고 손벽까지 치면서 응원하는 엄마의 사랑에 힘입어 집어 올리기를 수도없이 반복한다. 조금있다가 같이 합류한 아빠까지 아이와 놀아주는데 곁에서 보는 나의 마음이 훈훈해지도록 이 아이에 대한 사랑이 지긋하다. 하루빨리 이 아이가 카트만두에서 수술해 줬다는 의사를 다시 만나기를 희망해 본다. 그러나 경제적 으로 열악한 이 가정에서나 정부가 변변찮은 의료 기술로 크게 도움을 줄 수 있을것 같이 않아 안타깝다. 


둘쨋날: Lower Sinuwa에서 Himalaya 

산을 오르는 길이 무척 아름다웠다. 우거진 숲과 바닥에 깔린 낙엽들과 지나치게 많지는 않은 계단들을 즐기며 천천히 오르막 길을 걸었다. 날씨가 아주 맑다가도 여지없이 보통 11시 정도가되면 높은 산들에 쌓였던 눈들이 센 바람으로 하늘로 끌려 올라가다가 어느센가 몰려온 구름으로 높은 산정상만이 가려지면서 그 비범한 모습을 감추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오늘은 처음엔 날씨가 좋았다가 계곡을 차고 오르는 안개가 빠른 속도로 우리들을 따라 잡으면서 멀리에 보였던 고산들은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옆으로 보이는 계곡과 산들의 옆구리만 보면서 올라갔지만 경치는 참으로 훌륭했다. 어디서나 지천으로 흐르는 물은 멋진 폭포를 만들며 흘러내리고 있었고 계곡을 차고 내려가는 물소리들은 상쾌했다. 아열대성의 키가큰 나무들과 도토리 나무들,네팔의 국화인 철쭉나무 (Rhododendron) 에 매달려서 자유로이 이나무 저 나무로 뛰어 다니듯 날아 다니는 얼굴은 까맣고 온 몸은 하얗거나 회색으로 된 털로 온통 뒤덮힌 원숭이 가족( Langur monkey)을 보기도 했고, 길 바닥의 작은 웅덩이곁에 쪼그리고 앉 아서 여차하면 튀어서 도망갈 자세를 취하면서도 한손으로 물을 움켜 퍼먹고 있던 원숭이 가족들도 산행길의 즐거움 을 더 해 주었다. 비가 내릴듯이 흐린 날씨였지만 걷기에는 쾌적했고 느긋하게 오고가며 만나는 현지인에게나 등반객 에게나 " Namaste" 라고 인사를 하며 천천히 올라갔다. 

Bamboo( 2300 미터)란 마을 이름에 어울리게 많은 대나무들도 트레일에 많았다. 키가 작고 가는 세죽 이었지만 가늘게 쪼개어 엮어서 집을 지을때 쓰거나, 물건을 운반할때 사 용하는 큰 바구니로, 집에서 기르는 닭들을 가두는 용도로 훌륭히 사용되고있었다. 점점 위로 올 라갈수록 구름으로 가려져서 높은 산들은 여전히 보이지않았지만 계곡 양옆의 경치만으로도 걸어올라가는데 재미를 더해 주었다. 


셋쨋 날: Himalaya에서 ABC 

올라갈수록 트레일은 너무나 아름답다. 안개속에 갇힌 계곡 양옆의 절벽에 가까운 산들은 신비함까지 더해준다. 길가에 세워진 퇴색된 입간판에 Sinuwa에서 ABC구간은 신성한 지역이니 육류고기의 반입 을 하지말라 는 주의에 덧붙여 이 경고를 어기면 자연재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항이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 한 후에는 집근처에 매단 새끼줄에 꽃들과 나뭇잎을 총총히 꽂아넣고, 방문 양턱에 가지런히 금숭화 꽃을 놓는 현지 인에게가 아니고 이곳을 오르내리는 이방인에게한 경고임에 틀림없다. 비록 간판엔 네팔 글과 영어로 가지런히 쓰여 져 있어도 말이다. 몇자욱 안가서 서있던 퇴락한 shrine에는 누군가의 사진도 세워져있고 꽃과 쌀들로 공양을 드린 것을 미루어 보아 기도하는 곳 임을 알텐데도 여지없이 새겨진 낙서들, 그중엔 한국 이름도, 산악회의 이름 조차도 있어서 씁쓸했다. 이렇게 이름을 남기고 싶은 사람들은 산장 곳곳마다 현수막으로, 명함으로, 기증한 시계위에 조차도 자신들의 흔적을 남겨 놓고 갔었다. 

고도가 서서히 올라가는 길은 점차 나무가 없어지고 풀들로 덮였지면서 완만해지고, 멀리서 보이는 눈덮힌 산들이 신 비감을 더해주어서 힘들지 않고 즐기면서 올라갈수있었다. 카트만두에서 고아원에서 봉사를하고 시간을내어서 오신 다는 한국인 목사님 일행을 만나서 이런 저런 현지 상황을 들으며 같이 올랐다. 화장을 아주 곱게하고 계시는 나 또래 의 여자분은 고산증세로 아주 힘들어 하시며 오르고 계신다. 증세를완화 시켜 준다는 약을 아침에 잡수셨는데도 그러 하신다니... 더욱 천천히 걸으시고, 심호흡을 꼭 하시고, 물을 조금씩 잡수시며 오르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씀드리곤 시간이 적은 나는 이쯤에서 발을 빼고 내 갈길을 서둘렀다. 

여정이 같은 것을 알고는 같이 움직이다 가 둘쨋날 헤어진 산동무님의 후배를 다시 만났다. 저만큼에 MBC( Machhapuchhare Base Camp)의 lodge들이 보이는 구간에서 내 려오고있는 그 한국 여학생을 다시 만나서 반가웠고, 처음 등반을 했지만 고산증도 없이 더구나 등산화도아닌 나이키 운동화로 무사히 ABC를 마쳤다고하니 나이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듯하였 다. 

점심을 먹기위해 드른 MBC( 3700 미터) 의 한 lodge에서 고산증으로 자고있는 남자 곁에 나또래의 부인이 근심스레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형님 내외와 이 곳을 왔는데 고산 적응차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늦게나 출발한다고한다. 포터가 짐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엄 청나게 많은 음식들을 볼수 있었다. 저 많은 음식을 언제 다 먹을수 있을지 걱정스러울 만큼 지나치게 많은 짐을 져 나르는 포터들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래도 여기서 본 포터들은 운동화라도 신고 있었지만 심지어 circuit 에서의 포터들 중에는 여자들 조차도 조리나 슬리퍼를 신고서는 무거운 짐을지고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는 경우도있었고, Tilicho 호수( 4949미터/ 16237ft)를 지나서 눈산행을하는 trekkers 의 장비를 운반하는 포터들 중에 열악한 신발을 신고서 쇠로 만든 접는 테이블과 의자들을 힘겹게 지고 가는 것을 볼때는 이 산중에서조차 우아하게 식사를 하셔야 하는 trekkers에게, 또 이런 서비스로 고객을 대접하고 싶은 대행 agency에 대해서 무척 화가 많이 났었다. 사실 산에 오를 때 여분으로 준비한 한두 벌의 옷이면 도중에 세탁을하면서 움직일수 있고, 음식도 현지의 음식을 먹으며 풍습을 알고 차이점 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여행의 멋일수도 있으며, 다소의 불편함은 감내해야하는 것이 아니던가? 

MBC( 3700미 터)를 지나서 30분 정도가 지나서 부터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이기 시작하더니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따 라붙으면서 10미터 정도가 간신히 보일정도로 짙어진다. 그래도 왼편으로 눈 덮인 높은 산이 보이고, 옆의 얕은 언덕은 controlled fire로 검게 탄 잡풀의 흔적과 작 은 개울의 양편엔 얼음이 얼어있지만  얼지 않은 가운데를 통과하며 졸졸졸 흐르는 물 소리만 이 고요한 정적을 깨고 있었다. 이렇게 구름 속을 두어시간 걸으니 저편 언덕 위로 희미하게 집 한채가 보이기 시작한다. 

가이드인 쿨이 저기가 ABC(4130미터/ 13582 ft)이란다. 계단이 전혀 없어서 좋은데다가 고도의 변화도 크 게 느끼지 못하면서, 간혹 돌들이 박힌 흙길을 밟으면서 참으로 여유자적하며 쉽게 올라왔는데도 드디어 눈앞에 목적 지가 턱 버티고 있음을 보았을때 크게 가슴이 뛴다. 그런데 안개권을 벗어나니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전후 좌우 사방 팔방에는 전혀 안개가 없고 환하게 빛나는 높은 산들이 신기루 처럼 나타난다. 뒤돌아보니 뒷쪽 저아래에는  커다란 안개 덩어리가 산과 산 사이에 걸려 있으며 낮은 계곡을 따라서 여전히 천천히 따라 올라 오고 있다. 

그리고보니 나는 파노라마로 산들이 좌정하고 있는 분지의 중앙에 서 있다. 왼쪽으론 높은 ridge와 Annapurna South와 정면에 좌정하고 있는 구름에 가려진 Annapurna 1봉과 오른쪽 뒤쪽으로 걸쳐 Hiunchuli, Gangapurna, Machhapuchhare산들의 위용앞에 경이로움과 찬탄과 신비스러움에 그냥 발걸음을 멈추고 360도로 몸을 천천히 돌려가며 잠시 넋이 나간 듯이 서있을 수 밖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정말 멋졌다. circuit을 돌때 처음으로 Annapurna 2봉의 발치에 섰을 때의 가슴이 뛰며 설렜던 그 감격이 새삼 생각나며 우리의 긴 여정의 목적지가 바로 여기 이 분지에서 완성되는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빠른 시 일내로 이곳을 다시 찿을 산길동무의 계획을 알고 있기에 덜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같이 볼 수 있더라면 더 좋았을텐 데...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Paradise란 산장에서 짐을 풀고 두터운 쟈켓과 장갑으로 중무장을 하고선 가이드없이 나 혼자서 바로 뒤의 얕은 언덕 으로 향했다. 어디서에서나 보았던 불경이 적혀진 오색 깃발이 탑에 걸려서 휘날리고 있 고 어느새 뒤따라온 안개가 깊이를 알수없는 계곡에 깔려있고 탑 에는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과 중장년들의 위패가 소박하게 올려져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안나푸르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여정을 축 하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무엇을 해 낸다는 의미가 무한한 기쁨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 준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수가 있었다. 

만년 설이 부채꼴 모양으로 흘러 내려서 골과 골들을 채우고 있고 그 아래는 안개로 채워져 있는데 석양에 환하게 빛나는 산들이 더욱 환상적이다. 드디어 산정상들이 붉으스럼하게 밝혀지고 그 커다란 덩어리가 안개위로 떠 있는 모습을 볼 때의 그 장엄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이 안된다. 그냥 또 멍하니 쳐다볼수 밖에 없는 나의 찬사 방법으로는 어떻게 표현 할 길이 없다. 

산장의 식당에서는 독일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영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가득 차있고 캐나다와서 왔 다는 중년의 남자 셋, 포터와 가이드들이 모두 다 여행담으로 서로의 이야기들을 들어주며 지구인의 한 모습으로 채우 고 있었다. 난로가 없는 그곳에서 두터운 옷들로 슬리핑 백으로 혹은 그날 밤 그 식당 안에서 잘 포터와 가이드들이 덮 을 담요들에 싸여서 왁자지껄하다가 개스 히터 하나를 식탁 밑에 제공 받고는( 식탁을 덮고 있던 담요같은 것이 왜 그 렇게 바닥까지 내려왔는지 이유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몸이 덥혀지고, 맛있는 음식에 포만감을 느끼며 이야기들은 더욱 더 깊어지며 하늘 바로 아래의 밤은 깊어갔다. 

이곳 산장에서 만난 많은 젊은이들은 고등학교나 대학을 마치고 몇개월에서 일년동안 번 돈으로 장기간의 여행을 하면서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숙고해 본다고 했다. 돌아가면 대학 을 가겠다거나, 전공을 바꾸어서 공부를 더 한다든지, 여행을 더 계속하겠다든지 다양하게 계획들이 있다. 불쌍한 미국 학생들은 이러한 정신적인 여유도 없이 생활비에 학자금 상환에 일터로 내 몰려야하는 현실에 안타깝다. 자가 발전기로 만들어진 전기가 끊겨질때까지 회포들을 풀다가 헤드렌턴에 의지해 숙소로 돌아갔다. 사방 어디서나 불빛 한점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는 무수히 많은 총총한 별빛만이 어두운 밤하늘 가운데 떠 있었다. 온통 어두움에 쌓인 높은 산들이 잠들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신비스러웠고, 평화로웠다. 


넷쨋날: ABC에서 Lower Sinuwa 

해뜨기전의 미명에 Annapurna 1봉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말끔하게 그 자태를 드러내 보이며 푸르고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의연히 서 있다. 떠오르는 해를 받으며 더욱 밝게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다. 그 주위를 호위하며 서 있는 모든 산들의 모 습들 또한 각자 한 몫을 다하고 있다. 멋 있다. 정말로 멋있다. 

어제 밤에 먹은 달밧(Dal bhat)이 맛있어 아침에 다시 시켜먹 고선 8시에 하산을 한다. 저멀리에 안개에 쌓인 MBC가 희미하게 보인다. 뒤돌아보면 이미 그장엄한 위용들은 구름에 가려져서 보이지가 않고 이미 안개가 밀려 올라와서 이 안개속을 내려올때, 아침 6시에 올라온다는 첫 trekker들을 만났다. 이 사람들이 위로 더 올라가며는 어제 내가 오후에 올라올때처럼 안개 덩어리가 말끔히 걷히고 멋진 경관을 볼수가 있을지 궁금해 지면서 산에서의 바로 그때 , 바로 그 시간의 묘미가 엄청나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며 이 모든 장관을 보게 되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안개속에 잠든 MBC를 지나면서 조그만 돌들에 미끌어지면서 오른쪽 팔꿈치로 바닥을 꽉 찍으며 속절없이 주저 앉았다. 확 현기증이 나면서 머리속이 순식간에 써늘하다. 그러면서 이 서늘한 기운은 곧 사라지긴 했지만 감전 당한 듯 등골을 타고 다리를 통해서 빠져 나갔다. 역시 ABC 에서 MBC 까지는 완만한 내리막 길이지만 그래도 조심하며 오르락 내리락의 굴곡이 있었던 Deurali(3230미터)까지 무사히 내려왔다. 

우유와 과자를 간식으로 먹으며 생각보다 일 찍 끝날수 있어서 아주 느긋하게 즐겼다. 스물거리며 아래쪽의 계곡으로 부터 올라온 안개 덩어리를 즐길 여유조차 생 겼다. 점심 손님이 많은 Himalaya를 지나고 우리는 Dovan(2600미터)에서 점심을 먹기로 결정하곤 울창한 세죽과 철 쭉나무와 이끼가 많이 매달려있는 잡목이있는 축축하면서도 아기자기한길, 계단이 있었지만 견뎌낼만하고,을 걸으며 개울도 건너고 하면서 이미 왔던길을 돌아가는데도 걷는 재미가 아주 달랐다. 어쩌면 이미 올라오는 길에 만났을지도 모를 원숭이 가족과 조우하면서 자연 속에서 주어진 여건을 아주 즐기며 사는 이들의 모습과 무거운 짐을 지고서는 무 게를 분산하기위해 이마에 둘러맨 끈으로 인해 아래만을 바라보 며 무거운 짐들을 져날라야하는 우리네 불쌍한 네팔 사람들과 누구가 더 행복할진 각자의 생각에 달렸겠다. 

비가 오 려는지 Dovan에 도착하니 바깥쪽에 내 놓은 테이블과 의자들엔 푸른색 tuff로 덮어 놓았고 서너명의 등산객들은 식당 에 모여서 점심들을 먹고 있었다. 맛이 괜찮았던 야채 와 달걀로 뽁은 국수에다 black tea를 마시곤 , 산을 향해 오를땐 고산증 완화에 도움을 준다는 생강차나 마늘 숲을 무 척 먹었는데, 또 여유있게 산을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는 여유도 누렸다. 구름이 주위를 무겁게 내려 누르 고 옆의 산들 을 감싸고있었지만 내려갈 길은 잘 보인다. Chomrong(2170미터)까지 갈려고 예정했지만 피곤도 하고 그 끔직히도 많던 계단을 내려갔다 올라갈 여력이없어 오면서 잤던 Sheppa lodge에서 다시 잠들기로 작정하고 들렀다가 반갑게 맞아주는 네팔 처녀와 애기엄마를 만나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을 다 시금 생각했다. 


닷셋날: Lower Sinuwa에서 Kiume 

아! 그계단들! 정말 많았고 힘들었다. Chomrong엔 맛있는 빵을 파는 German Bakery가 있으니 꼭 사먹으라는 말을 들었다.  올때는 들렀던 왼편에 처음 나왔던 가게의 빵들은  맛이 없었으니, 돌아 갈땐 처음에 나오는 왼쪽편 가게에 꼭 들러서 맛있는 빵을 먹어야지하는 희망으로 한 계단 또 한 계단을 오르며 이제쯤 나 오나 하 면서 기대하고 올라도 여전히 끔찍한 계단길이다. 

드디어 도착한 그곳에서 먹은 쵸코렛 케익 한 조각과 블랙 커피는 네팔에서 먹은 음식중 제일 호사로운 것이었다. 크림 한조각조차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긁어서 먹기는 처음인 듯하다. 이곳에서 매년 네팔로 요가와 명상 수련을 하러와서 두달씩 머무르다 간다는 브라질에서 온 사업을 한다는 중년 남자 와 명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상에서의 가치를 다르게 보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오고가는 길에서 만난 많은 중국 젊은이들과 눈인사를 하면서 무섭게 커 져가는 중국의 경제력의 한 단편도 보았다.이들이 입은 옷들은  촌스러운 복장이 아니라 세련되었 고 영어도 어느정도 소통이 되었다.  

이곳의 계절은 역시 가을이었다.  좁디 좁은 계단식 농지에서 재배한 쌀들과 좁쌀들은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수확을 하고 있었다. 논 바닥에서 말린 볏 단을 넓적한 돌과 흙으로 혹은 시멘트로 평평하게 만든 마당에다 가져가 놓고 선 적당한 양으로 묶어선 아무런 도구도 없이 사람들이 그냥 들어올렸다가 바닥으로 내려치는가하면 그냥 막대기로 때리면서 벼알을 털어내고 있었다. 좁쌀 이삭만을 살뚝 잘라서 방바닥이나 마당 한 구석에서 말려서는 역시 막대기로 내려 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게 수확한 쌀들로 흰밥은 언제나 식당에서 더 주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는 이곳의 인심이 얼마나 후한지 짐작할수 있었다. 

Chomrong(2170 미터)에서 Jhinu Dada(1780미터)로 내려 오는길의 경사가 아주 급했고 때로 돌계단도 지내야 했지만 유난히 멋있게 생긴 닭들의 자태를 보는 재미에, 발아래로 펼쳐지는 빨려 들기에 적당하게 첩첩히 나열되는 아련한 산들과 많은 물들이 밀려내려가고 있는 계곡의 경치에 힘듬없이 발걸음을 옮 길수 있었다. 

산길동무가 내려간 Landruk으로 가는 길을 따 르지 않고 Modi 강을 따라 내려가는 지름길로 빠져서 오 른쪽의 산 기슭을 타고 내려와서 Beehive란 이름을 가진 lodge에서 잠을 자기로 했다. 이 이름은 강 건너편에 깍아 지른듯한 절벽이 있었는데 그 절벽에 매달려 있다는 벌집 을 의미한다고 했다. 옛부터 벌꿀에 대한 수요때문에 많은 현지인들은 원시적인 방법으로 외줄에 몸을 지탱하고는 벌 집을 채취하는 위험한 일들을 해 왔지만 근래에 중국이나 한국으로 부터의 수요가 더 급증했다고 한다. 이곳은 아열대성 기후를 지닌 지역으로 지천으로 많은 꽃들과 잡목이 자 라고 있으며 습도도 무척 높았고 오는 도중 내내 매미소 리를 들으며 내려왔다. 흐린 날씨탓에 태양열로 데워야하는 샤워할 물이 없어서 산동무님이 주고간 버너에 물을 끓여 서 샤워도하고, 빨래도하고, 마지막으로 유담뽀도 가득 채워 서 따뜻하게 자고. 산행내내 이 유담뽀로 얼마나 따뜻하 게 잤는지 참 고마운 산행 동반자였다. 

엿셋날: Kiume에서 Pokhara 


두어시간만 그다지 높지 않은 언덕길을 걸어가면 버스를 타고 Pokhara(820미터)에 도착하고 그다음날 비행기타고 카트만두(1350미터)도착하고 그다다음날 한국가는 비행기타고... 이러면 이젠 마지막이네, 다 끝났네하는 안도감에 밤새 푹 잘 자고 야채튀김같은 음식과 야채 숲으로 아침을 먹고 출발했다. 

이틀만에 처음보는 해는 반갑기 그지없고 쾌적한 공기에 매미소리와 공중으로 날다가 나무에 앉는 조그만 새들, 이구간에서 유난히 많은 작은 새들을 보 았다. 참으로 한적하고 평화롭다. 뒤돌아보니 왼편으로 Annapurna South, Annapurna 1 봉과 Hiunchuli가 보이고 오른쪽에 보여야 할 Machhapuchhare는 보이지 않았지만 참 멀리도 갔다 왔구나가 느껴지며 참으로 아득하게 느껴진다. 또 다시 올 수 가 있을 것이라고 기약을 할수가 없으니 차마 발걸음 떼기가 힘들어 돌아보고 또 돌아보면서 이러다가는 버스놓치면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기다리느라 힘들 것이란 쿨의 재촉에 발걸음을 돌린다. 

Siwai에 도착 하니 낡은 버스에, 택시에, 짚차가 많이들 운집해 있었지만 우리가 타야할 버스는 아직 도착을 안했다. 싸게 해 줄테니 타라는 짚차는 거절했다.   짚차를 탔을때 하도 험한 돌길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다보니 머리를 두어번 심하게 유리창에 부딪힌 나쁜 기억에 타고 싶은 생각은 전혀없고, 그래도 현지인을 만날 수도 있고 가격도 싼 버스가 훨씬 나았다. 근처의 찻집에서 커피와 과자 를 먹으면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탄 버스에는 산행을 끝낸 등산객들과 현지인들이 많이 있었다. 여느때처럼 내 큰가방은 익숙한 솜씨들 에 의해 이미 차위에 던져져서 얹히고. 

앞 좌석에 앉은 현지인 부부가 안고 있는 아기가 얼마 나 예쁜지 두살난 아들이 있다는 쿨도 애지중지 아끼던 쵸코렛 바 하나를 꺼내어 아기에게 주었더니 방긋거리며 엄마 어깨위에서 뒷자석으로 고개를 내밀곤 했다. 내가 느끼기엔 지금 이나라의 형편 이 우리 한국의 60년대 초와 비슷했다. 이미 산골 깊은 곳에 사는 현지인들이 중국산 셀폰으로 전화를 하고 타국으로 돈벌러 떠난 젊은이가 많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젊은이들이 전화 기로 미국의 팝송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키우고 있었지만 50년이나 의 갭을 메우려면 어떤 노력 을 이 아이들이 해야 할까를 생각하니 아득해진다. 인터넷으로 정말 세상은 한 나라같이 연결이 되어가고 있으니 이나라도 가난한 내 형제 나라로 여김을 받으며 도움을 받을 수가 있을까 아니면, 근접한 어떤 나라가 홀딱 삼켜버리지나 않을까 저으기 염려스럽다. 

ABC 트레킹은 초보나 경험자나 누구나 할수있는 멋진 구간으로 고산증에 대한 이해와 대응 으로 안전하게 산행 을 마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산행에서 만난 많은 젊은이들은 동남아 여행의 일환으로 여행비가 싼 이곳을 찿기도 했다. 양옆의 높 은 산으로 난 계곡을 따라 걷는길은 다양한 생태계의 모습과 다른 이민족 그룹으로 이루어진 촌락을 지나면서 금숭화 같은 빛나는 황금빛 꽃들과 밝은 색깔로 색칠하고 창문은 문양들로 멋을낸 현지인들의 집들과 훈훈한 소박한 사람들 을 만나기 좋은 곳이었으며 경이스러운 산들의 모습엔 저절로 찬탄을 금할수 없었던 아름다운 참으로 아름다운 산행 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