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종주 및 빨치산 Trail (10/6~8/2022)
2022년 10월 6일 목 맑음
2022년 10월 6일부터 2박3일 일정으로 지리산을 찾았다. 지리산 종주는 지리산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활처럼 굽은 25.5㎞의 주능선을 산행하는 것을 종주라고 한다. 등정에서 하산 거리까지 합치면 보통 50km-60km가 넘는다.
지리산(智異山)은 '머물면 세상과는 다른 종류의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이라는 뜻이다. 지리(智異)는 다름을 아는 것, 차이를 아는 것, 그리고 다름과 차이를 인정한다는 의미다.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구례군, 남원시,그리고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반야봉에서 빗점골, 피아골까지.. 여기서 감도는 기운은 625때 좌와 우의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피로 온 산을 적셨던 억울한 원혼들이 구천을 떠돌고 있는 곳이다.
노고단 입구 (1박) - 노고단(성삼재) 출발 - 벽소령/연하천 – 세석 대피소 (1박) - 장터목 - 천왕봉 – 중산리로 일정을 잡는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민족 정기의 상징인 백두대간이 삼천리 한반도를 달려 반도의 남쪽에 솟은 민족의 영산 지리산은 한민족의 역사에서 언제나 어머니처럼 모든 것을 감싸고 품어 왔다.
1994년 백두산에서 ..
지리산은 쫓겨온 자들의 땅이었다. 항일의병, 동학혁명군, 항일빨치산, 한국전쟁의 빨치산도 이곳에 몸을 숨겼다. 지리산에는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백두대간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먼저 용산역에서 남원역까지 KTX를 탄다. 춘향이와 이몽룡의 도시인 남원. 남원에서는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같은 고전이 탄생했고, 동편제라는 판소리의 큰 줄기를 이루었던 곳. 기대가 된다. KTX역 앞 정옥추어탕 식당에서 추어탕을 먹는다. 맛도 있고 종업원들이 아주 친절해서 좋다.
추가로 반찬을 시켜도 모두 무료다. 음식도 정갈하고 깨끗해서 정말 마음에 든다. 개업한지 얼마 안되어서인지 아주 깨끗하고 세련된 식당이다. 영업시간이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6시간이다. 그래도 장사가 잘되는 것을 보면 뭔가 영업비밀이 있는 것 같다.
수저셋트가 각각 포장되어 나올정도다. 남원의 이미지가 이 추어탕집때문에 최고로 기분이 업되었다.
이가격이 11,000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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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야생화는 있을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고산지역 화개재에 와서야 이런 들국화를 볼수있었다.
흔히 사람들은 지리산을 두고 ‘어머니 품 같은 산’이라고도 말한다. 왜그럴까? 부드러운 능선과 산세 뒤로 어미가 자식의 모든 것을 감싸고 포용하듯, 모든 것을 수용하는 모습이다.
지리산에는 다양한 종교가 깃들어 있어도 서로 잘 지내고, 죄를 지은 사람이나 도망자의 은신처와 피난처가 돼 준 것은 물론, 역사의 격동기때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바로 저것이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어머니산 지리산이다.
지리산하면 빨치산과 떼려야 뗄수없는 인연이 있다. DPRK남부군 대장 이현상, ROK토벌군 대장 차일혁. 특히 나의 당고모부께서 625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그만 좌익사상에 빠져 지리산 빨찌산으로 활동했다는 내력도 있는 특별한 곳이다. 분단과 통일의 갈림길에서 형은 토벌대로, 아우는 빨치산으로 총구를 맞서게 했던 지리산. 이제 이들의 눈물이 비가 되고 영혼은 울부짖는 바람이 되었다.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지리산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일컫는다. 지리산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은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다.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자행된 살육과 약탈에서 보면, 빨치산이든 국군 경찰이든 모두 피해자였다. 지리산 자락에 삶의 터전을 잡았던 무고한 주민들이 입은 인적, 물적 피해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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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봉에서 지리산의 전경을 본다. 저 능선을 하염없이 쳐다 보던 한 70대 노인(오른쪽 사람)이 커피를 마시면서 저 계곡을 가리킨다. 빨치산 대장 이현상이 사살된 곳이라고 알려준다. 이 노인은 빨치산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깊은 상념에 빠져 오랫동안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다. “52년 1월 전투에서 토벌대가 휘발유와 네이팜탄을 쏟아 부어 능선을 초토화시켰지요. 4월에 들어서야 눈이 녹으면서 빨치산 시신들이 드러났어요. 그후 20년이 지난후에도 저 능선에서 해골이 발견되었지요.”
토벌대는 대성골에서 무려 10일 동안 엄청난 공세를 가해 위 사진 계곡이 완전히 불길에 휩싸였다. 지리산 자락에 살던 사람들은 그때의 불을 하늘에서 떨어진 천불이라고 했다. 빨치산들은 토벌군의 공격에 쫓기며 추위와 굶주림의 고통을 견디며 공격이 뜸하면 한 웅큼의 쌀과 바위 틈새에서 떨어지는 물로 겨우 연명하였다.
백선엽의 야전전투사령부는 군경 합동 작전을 1952년 1월 겨울에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지리산에 있던 빨치산들은 추위와 기아 그리고 무기의 절대적 열세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토벌군은 빨치산 보급을 막기 위하여 산간 마을, 심지어 사찰까지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육군본부의 자료에 의하면, 빨치산 대원5천 8백여 명이 사살되고 5천 7백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총에 죽고, 병에 죽고, 얼어서 죽고, 굶어 죽어갔다. 이현상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죽은 걸로 알려져 있다.
이 현위치가 바로 빨치산 격전지를 한눈에 조망할수 있는 곳이다.
이름 모를 야생화가 피로 얼룩진 토양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빨치산들이 마셨을 지리산 계곡물
저 지리산 대성리 계곡은 영원히 빨치산 계곡으로 기억될 것이다. 1952년 1월 18일 군경토벌대에 쫓기던 지리산 일대 유격대와 좌익피난민 등 이천여 명이 대성리 골짜기에서 포위되어, 미군이 네이팜탄 등을 투하하여 천 명 이상 죽거나 체포되었던 무시무시한 대성리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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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간 영혼들을 달래려는 야생화가 바위틈에서 슬픈(?)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밤에는 빨치산들이 식량을 약탈을 하고, 낮에는 토벌대가 빨치산을 잡느라고 산에 불을 놓았다. 이 게릴라전으로 인해 군경 6000여 명과 빨치산 1만여 명이 희생됐다.(당시 국회조사단의 조사에 의하면 8522명의 양민이 빨치산과 내통한 혐의로 처형됐다).
저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한 스님이 말한 것이 떠오른다. "이현상이나 군경 토벌대의 죽음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 죽음을 나의 죽음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평소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 파악하지 않고 살아간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끊고 지리산에서 희생된 죽음과 나 자신을 일치시켜라"
이현상의 비트가 발견된 곳. ‘비트'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이 은신처로 활용하던 공간으로 동굴이나 지상에 위치한 은신처를 말하며, 지하에 만든 은신처는 '아지트(Agitation point) '란 말로 구분해 부른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현상의 토벌 없이 지리산의 안정 없고 지리산의 안정 없이 대한민국의 안정 없다"라고 말했다.
이현상 (1905-1953) 빨치산 남부군 총사령관
빨치산의 아버지 이현상은 고려대 법대를 다니던 지식 분자였으며 반외세, 반제국주의자 였고 남한 사회에 공산주의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이현상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게 이용만 당하고 지리산에서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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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ZANNE CLOUTIER LIFE MAGAZINE DECEMBER 1, 1952 THE SAVAGE, SECRET WAR IN KOREA
1952년 12월판 LIFE 잡지에 집중취재된 빨치산의 야만적인 게릴라 활동을 크게 보도했다.
지리산 빨치산은 1950년 1월에 산청군 화개면에서 국군 70여 명을 기습하여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국군과 경찰은 추위를 이용하여 민간 부락과 빨치산의 통로와 소통을 차단하고 난 뒤 본격적으로 토벌 작전을 단행하였다. 빨치산들은 혹독한 추위에 보급로가 끊긴 채 군경의 토벌 작전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지리산이 격전지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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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천 대피소에서 헬기가 건축자재를 나르고 있었다. 만나기로한 전남대 교수는 어데 갔는지 알수없고. 헬기착륙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남자 산행자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밥이 차가운 것을 이들이 ‘화학발열기’로 조금 덥혀준다. 그러나 별효과가 없다.
벽소령대피소에서 대부분이 쉬어간다. 공단직원이 세석으로 가려면 5분내로 여기서 떠나야한다고 경고한다. 빨리 어두워지기때문이다. 여기서 머물러야하는데… 혼자 커피마시며 지리산 역사를 설명하던 그 남자도 나를보고 아직도 안떠났느냐면서 걱정한다.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해가 바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걱정이된다. 다행히 남자 5명이 앞서고 있다.
비구름이 몰려온다. 바위2개가 가로막는다. 아무리 밑을 쳐다보아도 이어지는 길이 안보인다. 어두워서… 다른 남자가 미리 간 남자한테 전화한다. 어디에 길이 있냐고? 그 남자는 퉁명스럽게 바로 거기 왼쪽으로 보면 있다고 말한다. 자세히 보니 있다.
세석대피소
젊은 남자들을 따라 진행한다. 이 남자들이 없었으면 칠흙같은 밤길에 큰일 날뻔했다. 어두워진 후 거의 2시간만에 세석대피소에 도착한다. 공단직원이 우려스런 표정으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리번호표를 받는다. 자리배정을 못받은 사람들이 그냥 건물안에서 잔다.
세석대피소는 대피소 중 규모가 제일 큰 것같다. 많은 산악인들이 스스로 요리해 먹는다. 밤에는 삼겹살을 굽고 소주를 기울이는 사람들도 있다. 2층 bunker에서 자는데 너무나 덥다. 옆에서 코를 골고. 방 공기가 너무나 안 좋다. 도저히 잘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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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주어진 공간, 76번. 논산신병훈련소 내무반이 생각난다. 공기가 탁하고 먼지로 가득하고 난방이 너무 세어 더워서 잠을 이룰수없다. 190명 수용의 세석대피소.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찬 이곳. 남자 90 여명이 한꺼번에 코를 골아대니.. 도저히 참을수없다. 그냥 밖에 나와 새벽 4시가 되기를 기다린다. 한숨도 못잔다.
밤새도록 이 지도만 보고 내일 계획을 세운다. 로비에서 핸드폰 충전하면서 간단한 맨손체조를 한다. 하루정도 잠을 못자는 것은 내 몸이 견딜수있다.
2022년 10월8일 토 맑음
촛대봉에 오르는 일행과 합류한다. 아침을 대충 어제 산 햇반을 먹고 떠난다. 물이 너무 부족해서 화장실에도 물이 안 나온다. 그러나 대변기에는 물이 나온다. 정말 알수없는 시설이다. 너무 고생스러운 세석대피소. 그러나 많은 추억을 만든 곳이다. 다행히 촛대봉에서 해돋이를 보게된다. 저 멀리 진주가 보인다. 계속 천왕봉까지 오르는 길. 안개가 멋진 운무를 만들어서 사진에 담는다.
촛대봉에서 일출은 Grand Canyon 일출보다 더 감동적이다.
촛대봉에서 이렇게 일출을 볼수있는 확률은 낮다고 한다. 모두들 상기된 표정으로 사진찍기에 바쁘다
장터목 대피소가 저 밑에 보인다.
10월 새벽의 기온은 얼음이 얼정도로 춥다. Headlight와 두툼한 오리털 잠바는 필수다.
천왕봉에 올라가는 마지막 Ascending trail. 이것만 오르면 모든 어려움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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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 대피소에서 본 쌍계사쪽 지리산.
장터목 대피소에서 천왕봉 올라가는 입구. 한 산행자는 사진을 찍어달라면서 나도 찍어준다. 멋진 지리산 종주사진을 얻는다.
운무에 싸인 천왕봉
10월초.벌써 지리산은 빨갛게 물들어간다. 빨치산으로 얼룩진 지리산의 상징 칼라는 바로 이런 빨강색일 것이다.
천왕봉 입구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저 멀리 노고단에서 여기까지 26Km (16mile)를 1박2일만에 온것에 스스로 대단함을 느낀다.
저 멀리 노고단에서 여기 천왕봉까지 걸어온 내자신이 대견하다.
장터목 대피소에 많은 사람들이 천황봉 등정을 준비하고있다. 장터목대피소에서 모두들 라면을 따끈하게 끓여먹고 있다. 나는 생라면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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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cket List 또하나를 지운다.
천황봉에 오르니 많은 사람들이 인증샷을 찍으려고 줄을 서고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는 역시 한국 현대사 역사의 현장이었다.
천왕봉에 오른 성취감에 오랫동안 지리산을 음미해본다.
이렇게 멋진 자연에 비극의 그림자가 덮고 있었다니.... 역시 어머니 지리산은 억울하게 죽어간 젊은 영혼들을 따뜻하게 품고 있었다.
경상도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이 trail은 무려 4Km를 그대로 올라오는 곳이라 모두들 지쳐서 울상이다. 산청 중산리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이다. 안되어보인다.
지리산은 굽이굽이 저 멀리 진주까지 뻗어있다. 저기까지 헬기타고 가면 20분이면 갈텐데.. 앞으로 4시간 더 걸어가야한다. 계속내려가도 끝이 없다. 바위바위바위… 끝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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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바위가 빨치산들이 망을 보던 곳이라는데… 이제 관심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드디어 중산리 매표소 주차장이 가까와진다.
식당이 하나다. 2박3일간 굶주린 배를 우거지국과 전으로 채운다. 얼마나 먹고싶었던가. 꿀맛이다. 배고픔과 추위, 공포감으로 떨던 빨치산들은 어땠을까?
이근처에 마지막 빨치산으로 알려진 정순덕이 생포된 곳이있다. 그녀는 1963년 11월 고향인 경상남도 산청군 지리산 기슭에서 29세의 나이에 체포되었다. 얼마나 배고팠으면 고향에까지 내려왔을까"
최후의 빨치산이 1963월 11일에까지 있었다는 것과 그것도 여자라는 것에 놀랍다. 사실 정순덕은 처음부터 빨치산은 아니었다. 산으로 들어간 남편을 찾아내라는 토벌대의 고문에 못 이겨 남편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남편도 죽고 대부분의 빨치산이 사살되면서 최후의 빨치산이 된 것이다.
이제 75년이 지난 지금 남북의 이념대결은 끝내야할때다. 빨치산과 토벌군에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한 산청군에는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이 세워졌다. 지리산에서의 동족상잔은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다. 단순히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살육과 약탈 만행을 저지른 것은 빨치산이든 국군·경찰이든 모두 피해자였다.
지리산 자락에 삶의 터전을 잡았던 무고한 주민들이 입은 인적·물적 피해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른바 “낮에는 대한민국이요,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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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로 얼룩진 산청군 단성면 (위사진)은 완전히 청정 유기농재배로 탈바꿈했다.
빨치산으로 오인된 양민들이 살해된곳. ‘산청 함양 양민학살 사건’으로 유명한 위사진 지역은 이제 주말농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피로 얼룩진 산청 산내면, 친구 주말농장에서 마지막 밤을 지새운다.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한쪽에서는 반동분자, 한쪽에서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 사달렸던 이동네 주민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모르는 위기의 나날들. 깊은 상념에 빠져본다.
산청군은 이제 타지인들이 대거 입주해서 중상류층 은퇴자들의 전원주택지로 변모하고있다. 친구가 일군 주말농장에 들렸다. 지리산 종주 마지막 밤을 마지막 빨치산이 생포된 산청군 지리산 자락에서 지새우는 것이 우연 치고는 너무나 놀랍다.
푹 단잠을 자고 일어나 창문밖을 본다. 저 멀리 지리산자락이 보인다. 빨치산 대원 당고모부를 생각해본다. 그분도 이현상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서울대를 다니던 좌익 지식분자였다. 포로가 되어 대한민국으로 전향을 했지만 폐결핵 환자로 공주 결핵요양병원에서 50대의 젊은 나이로 인생을 마감하셨다. 한번사는 인생 YOLO…. “만약 누군가가 20대에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그는 심장이 없는 자다. 만약 누군가가 20대가 지나서도 공산주의자라면 그는 뇌가 없는 자다.” 이 명언을 되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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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행적을 따라 역사 기행을 하는 듯한 장문의 블로그 후기 같군요.
역사 기행과 산행을 합쳐놓은 새로운 산행 후기 장르가 아닌가 합니다.
마치, 제가 따라 다니며 같이 한 느낌입니다.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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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행과 산행을 합쳐놓은 새로운 산행 후기 장르’- 과찬에 감사합니다. 새로운 장르는 아니고요.그냥 1년전에 기록해 놓은 일기에 빨치산의 역사를 조사하면서 덧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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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후기
잘 읽었습니다.
저는 몇년전 뱀사골의 아름다움에 넋을 놓으적이 있는데,
그 아름다움 뒤에 민족의 빨치산 역사를 듣고는, 너무 가슴이 저며, 말문을 잃은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가닉님 글에서 그때 다시 생각납니다.
그 당시 우리 민족상황에서
공산주의자가 아니면, 그는 심장이 없는자다... (공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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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2번 종주했지요.
한번은 무박 종주 (성삼재- 중산리) : 가장 힘든 산행으로, 산행후 무척 고생했습니다. 비추 하지마셈 ;)
두번째는 2박 3일 (벽소령, 장터목 각 일박) : 비교적 즐기면서 지리산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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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두번이나 갔다 오셨군요. 무박으로 성삼재-중산리 Trail 가능한가요? 역시 지리산은 뭔가 다르지요. 다음번에는 안가 본 Trail을 맨발로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차가운 지면을 맨발바닥으로 걸으면서 지리산 기운을 듬뿍 온몸으로 느껴볼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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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닉님의 글에 상세한 지리산 종주 정보와 불행했던 시대를 살며 우리 부모들이 겪었던 한국의 근대사 역사적 배경도 가득하네요.
저는 오래전에는 빨치산이라는 말이 산에서 숨어 활동하는 빨갱이로 알았었는데 어원이 프랑스어 Partisan (파르티산)에서 유래된 정규군이 아닌 소규모 무장 투쟁 단체를 지칭하는 단어인거 같습니다.
이념 냉전시대에 교육받은 세대라 그런가 빨치산하면 빨갱이가 산속에서 무장투쟁하는걸 뜻하는걸로 지레 짐작했나 봅니다. ㅎ
글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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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어원이 프랑스어 Partisan (파르티산)에서 유래된 정규군이 아닌 소규모 무장 투쟁 단체를 지칭하는 단어인거 같습니다” Google 해보니 그렇게 나오네요. 즉 빨치산은 비정규 민병대로 보면 될 것같습니다. 현재 미국내 Militia도 Partisan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수있겠지요.
전쟁 속에서 화엄사를 구한 영웅 '차일혁'
빨치산 (partisan)은 정규부대에 속하지 않은 무장 전사를 말한다. 좌우익과 관련 없이 비정규 게릴라 부대를 포괄적으로 부르는 용어다.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유격대원을 뜻하는 단어에 빨치산과 게릴라가 있다. 같은 뜻이지만 어감은 다르다. 게릴라가 테러리스트란 뉘앙스가 강하다면, 빨치산은 이념적 색채가 강한 느낌이다. 심지어 친대한민국 빨치산들도 한국에선 빨치산으로 불렀다. 이후 빨치산 토벌대장이 되는 차일혁도 원래 북한군 남하 당시 게릴라 활동을 하던 사람이다. 차일혁의 경우 특히 중국공산당과 함께 항일 빨치산 투쟁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였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고 이후 빨치산 토벌 작전 역시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 나무위키
'한국군과 유엔군에 소탕되어 압송되는 조선인민군 빨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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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 익숙하다 했는데 태백산맥에 나왔던가요? 꼬막 얘기도 있었던 거 같은데.. 가슴 먹먹하게 읽었던 책이네요. 고국 산은 별로 가보지 않았는데 지리산도 못 가봤네요. 언젠가는 꼭 가리라~
글 잘 읽고 갑니다. 귀한 경험과 지식 공유해 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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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게스트하우스
https://www.booking.com/hotel/kr/nogodan-guesthouse-and.ko.html남원에서 택시를 타고 구례 지리산 온천관광지까지 간다. 온천호텔들이 썰렁하다. 지리산 온천랜드가 문을 닫아버리니 관광객들이 발길을 끊어버렸다. 그래도 외국인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는 운영되고 있었다. 4인 1실방에 나홀로 편안하게 첫날밤을 잔다.
Guesthouse에서 주인과 얘기한다. 화살표 등선을 따라 노고단에 새벽에 오르겠다고 하니 깜짝놀라면서 말린다. 많은 빨치산 죽은자들의 귀신이 널려있는 곳이라고한다. 절대로 피아골에서 노고단까지 어두운 밤이나 새벽에 걸어서 올라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자기 같은 전문 산악인들도 꺼리는 Trail이라며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피아골과 노고단은 빨치산들이 가장 많이 활동한 곳이다.
2022년 10월7일 금 맑음
새벽에 연락이 왔다. 세석대피소 예약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지리산 종주가 가능해졌다. 성삼재 대피소까지 택시를 탄다. 이 택시주인한테 나머지 짐을 부탁한다. 이틀후에 중산리 대피소에서 만나 넘겨받기로 한다. 모두 15만원이다. 성삼재 Emart에서 먹을 것을 사려고 들어가려고 시도한다. 다른 젊은이도 문을 열려고 시도해보지만 안된다. 무인점포가 이렇게 허술해서야… 큰일이다. 먹을 것을 제대로 싸오지 않았는데.. 대피소마다 음식을 판다고 들었는데.. 노고단까지 오르는 산길은 차길이다. 내려오는 사람들한테 남는 음식이 있으면 달라고 말해본다. 역시 내려오는 사람들은 친절했다. 반갑게 이들은 남은 햇반과 반찬, 그리고 통에 들은 콩나물국까지 주고간다. 나중에 이것은 쉬어 버린다.
노고단에서 전남대 교수를 만난다. 자신의 일정을 시간대별로 자세히 적은 쪽지를 보여준다. 서로 경로가 다르고 산행속도가 달라 함께 갈수없어서 연하천 대피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는데 결국은 못 만난다. 이교수는 해마다 지리산 종주를 한다고 한다. 아마도 빨치산의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서 오는 것같다.
노고단의 운해는 짙은 안개로 볼수없었고 2주전에 올라온 사람이 찍은 사진을 대신한다. “노고”란 늙은 할머니라는 뜻으로, 곧 지리산 성모인 마고할미를 가리킴이다.
노고단에서 저 천왕봉까지 25.5 Km를 1박2일동안 걸어야한다. 남한의 단일 산능선 가운데 최장최고(最長最高)의 코스이다.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지리산. 소설 『지리산』, 『태백산맥』, 『토지』, 『혼불』 등 현대문학의 대작이 바로 여기서 탄생했다.
삼도봉에서 지리산 서북능선 방향으로 천왕봉을 바라본 모습. 지리산은 산이 산을 품으며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