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바람이 부르는 밤의 노래
글 사진 · 이병로 미국 주재기자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는 록키 마운틴 국립공원(Rocky Mountain National Park, 이하 RMNP)은 미국 국립공원 중에서도 방문객이 많기로 유명하다. 특히, 콜로라도 덴버에서 차량으로 1시간 30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접근성과 잘 조성된 편의시설 인프라 덕에, 5월 중순 이후 성수기엔 탐방객과 하이커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다.
4월 중순은 록키산을 방문하기엔 다소 이른 시기이다. 하지만, 봄 야생화가 록키산맥의 툰드라 지형에도 도달했기를 기대하며, RMNP와 더불어 그레이트 샌드 듄즈 국립공원(Great Sand Dunes National Park, 이하 GSDNP) 백패킹 일정을 짠다. 배낭을 꾸리는 것은 마치 어린 시절 소풍 전날과 같이 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부푼 기대 속에 배낭을 꾸리다 보니, 이미 마음은 콜로라도 록키로 달려간다.
북미 최대 모래언덕을 향하여
동부 워싱턴 디씨에 위치한 덜레스(Dulles) 공항을 출발하여 4시간의 비행 끝에 콜로라도 덴버에 연착륙한다. 첫 대면하는, 콜로라도 덴버의 공기는 차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국의 초봄 날씨를 연상시키듯, 코끝이 조금 매울 정도의 추위가 느껴진다. 덴버는 해발 1,800m가 넘는 콜로라도 고원(Colorado Plateau)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덴버 공항에 도착하면, 여행객들 모두 록키의 전경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광활한 평지에 공항이 위치한 지라, 사방 어느 방향에서도, 록키산군 들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발 4,000m가 넘는 고봉들을 필두로 병풍처럼 펼쳐진 산군들은 하얀 만년설을 이고, 서북방향으로 길게 누워 북아메리카를 가르고 서 있다. 그래서 록키산맥을 대륙 분단(Continental Divide)이라 칭하고, 또한 록키산맥의 주능선을 따라 북미의 3대 트레일 중 하나인 CDT(Continental Divide Trail)가 형성되어 있다. 눈앞에 펼쳐진 록키산맥의 웅장한 위용을 보고 있자니, “와”하는 탄성이 절로 터지며, 심장은 또 다시 설렘으로 요동친다.
콩닥거리는 설렘에 발걸음은 더욱 분주해 진다. 렌터카를 픽업한 후, 록키 산군을 우측에 끼고, 25번 고속도로를 타고 콜로라도주 남쪽으로 질주한다. 2박 3일을 보낼 첫 목적지 GSDNP로 향한다.
GSDNP는 덴버에서 남쪽으로 400km 정도 떨어진 북미 최대 모래언덕을 자랑하는 국립공원이다. 헤라드 산(Mt Herard·4,053m)을 비롯 해발 4,000m가 넘는 고봉들을 품고 있는 록키산맥의 산그레 데 크리스토 산군(Sangre De Cristo Mountains) 자락에 30평방 마일의 모래언덕들이 형성되어 있다. 200m가 넘는 모래언덕이 5개 이상 형성되어 있으며, 그 중 최고 높이의 모래언덕은 229m에 달하는데, 이는 북미에서 가장 높은 샌드듄이라 한다.
지난 1월, 데스밸리 국립공원(Death Valley National Park) 백패킹 시에, 메스퀴토 플랫 샌드 듄즈(Mesquito Flat Sand dunes) 다녀왔었던 바. GSDNP에 대한 나의 기대감과 호기심은 더욱 커진다.
록키산군을 물들인 신의 불꽃
한 시간을 달리다 보니, 콜로라도 스프링(Spring) 시의 랜드마크인 해발 4,302m의 고봉 파이크 피크(Pike peak)가 수호신처럼 우뚝 서, 콜로라도 입성을 반기는 듯하다. 파이크 피크는 서부개척의 골드러시 시대에 서부로 향하던 이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240여 km를 더 달리다 보니, 해는 록키 산군 뒤로 떨어지며, 붉은 석양빛이 불꽃으로 화하여, 흰눈을 이고 있는 고봉의 산군 들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듯하다. 장엄한 황혼의 불꽃 쇼에 빠져들어, 나도 모르게, 차를 갓길에 정차한다. 신의 불꽃 축제에 초대된 것 마냥,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록키의 대자연이 연출하는 장면을 마음껏 누린다.
노을빛은 시시각각 변화무쌍하게 타오르며, 백발의 록키 산군들의 존재감을 더욱 선연히 부각시켜 주는 듯하다. “자연의 경이로움이란, 몇 마디의 말로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순간, 이 경탄할 장면을 온몸, 오감으로 느끼며, 이 현장에 초대받음에 감사한 마음이 일어날 뿐이다. 마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신의 불꽃을 만났던 장면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노을이 지나가고, 칠흑 빛 어둠이 내린 150번 로컬도로를 타고 서둘러 야영지를 향해 달린다. 이내 오늘의 야영지 GSDNP 내의 피농 플래트 캠프장(Pinon Flats campground)에 도달하니, 시각은 어느덧 저녁 8시 반을 가리킨다. 덴버 공항에서 출발하여, GSDNP까지 400km가 넘는 거리를 4시간 반이 걸려 도착한 셈이다.
이곳이 바로 거대한 모래 언덕임을 알리려는 것인지, 어둠 속에서 몰아치는 모래바람이 거칠게 얼굴을 때린다. 모래바람은 마치 빗방울처럼 텐트를 연신 두드려 댄다. 밤하늘엔 모래처럼 별빛들이 반짝이고, 모래바람이 부르는 밤의 노래를 들으며, 콜로라도 록키의 첫 밤을 맞이한다.
밤새 텐트를 세차게 두드리던 모래바람도, 해가 뜨고 나니 어둠과 함께 사라진 듯 잔잔해진다. 밤새 거친 모래 바람은 텐트 안까지 모래를 들어앉혔고, 심지어 입안에도 모래가 씹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불편함도 잠시, 눈앞에 광대하게 펼쳐진 모래언덕과 그 뒤로 장승들처럼 서 있는 만년설의 고봉들이 전개된 풍경에 압도되고 만다.
단지 모래언덕이라고 하기엔, 그 규모가 실로 거대하고 장대하다. 가장 높은 모래언덕이 225m라고 하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규모와 높이는 ‘언덕’이 아닌, ‘산’이다. 데스밸리 국립공원의 메스퀴토 플랫 샌드 듄즈와 그 규모와 높이 측면에서, 가히 비교 불가라 생각된다.
바람과 만년설이 빚어낸 경이로움
GSDNP의 모래언덕 군들은 지질학 상 본래 바다였던 지형으로, 오랜 세월 풍화 작용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한다. 모래언덕 군 아래로는 산루이스 밸리(San Luis Valley)의 광대한 초지(grasslands)와 습지(wetlands)가 형성되어, 엘크(Elk)를 비롯하여 다양한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거대한 모래언덕 산에 매료되어, 나의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모래언덕으로 향한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모래언덕 산이 형성될 수가 있었을까?”
자연의 경이로움에 궁금증과 호기심은 GSDNP에서 제공하는 안내 지도를 보면 해소된다. 산루이스 밸리에서 불어오는 남서풍과, 록키의 고봉이 거대한 모래언덕 산을 빚어낸 것이다. 산루이스 밸리에서 시작된 남서풍이 몰고 간 모래는, 록키의 헤라드 산의 북서사면에 막혀, 마치 둥지처럼 모래 동산이 쌓이게 되었다. 고봉에 쌓인 눈들이 녹으면서 모래동산을 품 듯 계곡을 만들어 모래동산을 지탱하고 있는 격이다.
메다노 패스 프리미티브 로드(Medano Pass Primitive Road)에 들어선다. 메다노 패스 로드는 약 30km의 코스로, 오프로드를 즐기는 탐방객들에게 특히나 인기 있는 트레일이다. 메다노 패스 로드를 타고 약 16km를 운전하여 들어가면, 헤라드 산을 오르는 가장 짧은 코스의 들머리인 메다노 레이크 시작점(Medano Lake Trailhead)까지 접근할 수 있다.
다만, 쌓인 눈과 도로 사정으로, 메다노 패스 로드는 5월 중순 경에 오픈하다고 한다. 따라서, 메다노 패스 프리미티브 로드의 출발점에 차를 세우고, 캐슬 크릭(Castle Creek)의 종기점(End point)인 캐슬 크릭 피크닉 지역까지 오른 후, 메다노 크릭(Medano Creek)을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헤라드 산에서 시작된 메다노 크릭은 거대한 모래언덕 군 우측으로 흘러간다.
눈이 녹은 물이 크릭을 형성하고, 그 크릭이 샌드듄즈를 끼고 흘러가는 모습은 매우 생경하다. 마치, 산에서 바다 해변을 만나는 느낌이다. 크릭의 깊이가 옅은 곳을 찾아 모래 언덕 산이 시작되는 초입으로 접근하여, 본격적으로 샌드듄즈 하이킹을 시작한다. 모래 언덕을 오르는 트레일은 따로 없다. 그래서 하이커들 스스로가 자신의 트레일을 만들어 가며 걷는 재미는 모래 언덕을 걷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옅은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고, 모래 바람이 산루이스 밸리에서부터 모래먼지를 몰고 불어온다. 세찬 모래바람을 맞으며 가파른 오르막 모래언덕을 오르자니, 늪에 빠진 듯 모래밭 속으로 발이 푹푹 빠지고 만다. 그 빠지는 깊이만큼이나,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진다. 더구나, 피농 플래트(Pinon Flats)는 해발 2,400m가 넘는 고산지라 산소가 희박하여, 모래언덕 사면을 오르는 길은, 더 더욱 숨 가쁘게 한다.
맹렬히 몰아치는 바람을 뒤로하고
하이듄(High Dune)을 오르려면, 크고 작은 여러 모래언덕을 넘어야 한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한발 한발 무거운 발을 모래사면 따라 옮기다 보니, 어느덧 하이듄 아래 모래언덕 산에 도달한다. 모래언덕 위에 서 보니, 흰 눈을 이고 있는 록키의 고봉들 아래, 바람이 빚어낸 황금빛 유선과 사면의 향연이 설봉을 향해 펼쳐져 있다.
사방으로 펼쳐진 모래사면의 경관에 취하는 사이, 날씨 변화가 심상치 않다. 하늘은 짙은 먹구름으로 뒤 덮이고, 기온이 갑작스럽게 떨이지고, 모래 바람은 더 더욱 거세져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기세로 불어 닥친다. 하이듄 정상을 목전에 두었지만, 발걸음 옮기는 것은 고사하고 바람에 몸을 지탱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기상 상황에서 더 이상 진행은 무리라 판단. 9km 산행으로 만족을 하고, 서둘러 하산을 한다.
‘쌩쌩~ 덜컹덜컹~’
메다노 크릭을 건너 캠프사이트로 돌아오니, 텐트는 모래바람에 위태롭게 휘청거리고 있다. 텐트 가이라인(Guyline)에 팩다운으로 보강하고, 급하게 차안으로 피신을 한다. 바람은 더 더욱 거세지고, 옆 캠퍼의 RV 차량이 부럽기만 하다. 반시간이 지났을까, 옆 캠퍼가 다급히 차창을 두드린다. 내 텐트가 바람에 날아갔다고 한다. 팩다운하여 설치한 텐트가 맹렬히 몰아치는 모래바람에 속수무책으로 이미 날아가 버렸다.
급하게 뛰어나와 날아간 텐트를 수습하고, 다시 차량 안으로 피신을 한다. 포효하듯 굉음을 내며 몰아치는 바람은, 마치, 영화 ‘미아라’ 속 모래폭풍을 연상케 한다. 육중한 지프 랭글러(Jeep짋 Wrangler) 차량이 금방이라도 뒤집힐 형세로, 모래바람은 무자비하게 차량을 흔들어댄다. ‘뭔 바람이 이리 거칠단 말인가? 이러다 차가 뒤집히는 건 아닐까?’ 긴장감 속에, GSDNP에서 록키의 두 번째 밤을 전전반측하며 보낸다.
새 아침이 밝자, 밤새 몰아친 모래바람은 거대한 록키 고봉들 너머로 잦아들고. 모래언덕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 아침의 고요와 적막이 태연하게 점령하고 있다. GSDNP에서의 2박3일 일정, 메다노 패스 로드 탐방 및 샌드듄즈 트레일 산행을 하였지만, 일정 내내 모래바람과의 사투였다. 메다노 패스 로드가 폐쇄된 탓에, 헤라드 산까지 등반 일정을 소화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지만. 헤라드 산 등반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다음 행선지를 향해 짐을 꾸린다.
그레이트 샌드 듄즈를 붉게 물들이는 새 아침의 여명을 등지고, 콜로라도 록키 마운틴 국립공원을 향해 북쪽으로 차를 몰고 간다.
글 잘읽었습니다, 다음번 어디 가실지 기획중이신가 알려주시면 부지런한 베이산악회분들 중 즐겁게 조인하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